족보 문화의 실체를 드러내다

족보를 본 적이 없는 대학생도, 한 번만 본 대학생도 없을 것이다. 여기서 ‘족보’란 지난 학기들의 시험문제가 적힌 서류를 가리키는 대학가의 은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성균관 유생들도 족보를 돌려 봤다고 하니, 족보란 시대를 넘어 우리와 함께 해온 문화유산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예전부터 이어져 온 관습이니 족보 문화를 마냥 좋은 문화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대학신문』에서는 한국 대학가에 만연한 족보 문화의 문제점을 짚고, 그 해결책을 찾아봤다.

 

‘인맥' 속에서 암암리에 도는 족보

대부분의 서울대 전공 강의 족보는 해당 과 또는 반 내부에서 돌아다닌다. 전공 수업을 수강하는 학생이 같은 과 후배를 위해 족보를 남겨 놓는 문화가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해당 학과의 주전공생과 복·부전생 사이의 형평성 문제가 불거진다. 공대 소속 학과를 복수전공하는 A씨(자유전공학부·16)는 “주전공생들의 경우 새내기 때부터 쌓아 온 학과 내 인맥으로 답지를 쉽게 구하지만 복·부전생은 답지의 존재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A씨가 복수전공하고 있는 또 다른 학과의 경우 대다수의 강의 족보가 주전공생만 접근 가능한 네이버 카페에서 공유된다. 그 카페에는 필기와 최신 족보가 올라와 있으며, 주전공생이 아니면 가입이 불가능하다. A씨는 “해당 카페에 복수전공생이 접근할 수 있는 공식적인 경로는 거의 없다”라며 “주전공생 인맥을 통해서만 강의 족보를 구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와 달리 주전공생 간의 교류가 활발하지 않아 족보를 공유하는 플랫폼이 따로 마련돼 있지 않은 학과도 있다. B씨(경제학부·17)는 “학부 분위기상 주전공생끼리도 모임을 많이 갖지 않다 보니, 복·부전생과 마찬가지로 학내 온라인 커뮤니티 ‘스누라이프’처럼 공개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족보를 찾거나 소수의 지인을 통해 족보를 주고받는다”라고 말했다. C씨(경영학과·16) 또한 “학과 내에서도 개인적인 친분으로 족보를 얻는 경우가 많아 주전공생이라고 해서 큰 이점이 있지는 않다”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C씨는 “경영대 복·부전생들의 경우 (경영대의) 반과 같은 공동체에 속해 있지 않기에 입학할 때부터 반에 속하는 주전공생이 족보를 얻는 데 있어서 유리한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복·부전생 외에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소속 학과 사람들과 친분을 쌓지 못한 20학번 학생들도 족보를 어떻게 구할지 고민이 크다. D씨(사범대·20)는 “(족보를 달라며) 잘 모르는 선배와 동기들에게 선뜻 연락할 수는 없다”라며 “앞으로 족보 없이 공부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막막하다”라고 토로했다. E씨(인문계열·20)도 “교양 강의는 몰라도 전공 강의는 정보를 얻는 데 과·반 인맥이 상당히 중요할 것 같아 앞으로 걱정이 된다”라고 말했다.

 

‘돈'으로 거래되는 족보

최근에는 족보가 학과 내부에서 인맥을 통해 전달되기보다는 온라인 커뮤니티와 같이 공개된 장소에서 공유되는 추세다. ‘심리학개론’, ‘인간생명과학개론’ 등 특히 교양 과목의 족보가 이 경우에 많이 해당한다. 인간생명과학개론의 경우 스누라이프의 족보자료실에 이전 학기들의 기출 문제 및 속기록 등이 모두 올라와 있으며 교내 구성원이라면 누구라도 이용할 수 있다. 강의후기에 ‘족보를 활용하면 된다’라는 사실이 버젓이 적혀 있으며, 대부분의 수강생은 족보를 구해 공부한다.

반면 학내 온라인 커뮤니티의 익명성을 이용해 족보를 사고파는 일도 덩달아 발생하고 있다. F씨(인류학과·17)는 “최근 자료가 출제 경향과 유사하기 때문에 학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최신 기출문제를 구매했다”라며 “이를 되팔 때도 판매 글을 올리자마자 구매자가 나타났다”라고 말했다. 구하기 힘든 족보일수록 가격이 비싸지며, 그 값이 2~3만원에 이르기도 한다. 정상조 교수(법학전문대학원)은 “족보를 교수자 허가 없이 공유하는 행위는 돈이 오갔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모두 불법행위”라고 지적하면서 “다만 저작권자인 교수자가 고소를 하지 않으면 처벌되지 않기 때문에 당사자를 처벌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힘든 상황”이라고 말했다. 

족보가 금전거래로 이어지는 상황에서 문제의식을 느낀 일부 학생들은 최근 족보를 아예 온라인 커뮤니티에 무료로 공개하기도 한다. 지난 1학기가 끝나고 기말 시험 문제를 스누라이프의 족보자료실에 공개한 F씨는 “기출 문제를 특정 사람들이 돈을 받고 파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해 갖고 있던 족보 자료를 공개했다”라고 말했다. 그의 글을 포함해 족보를 공개한 대부분의 글은 베스트 게시물이 된다. 하지만 찾고 있는 족보가 공개된 자료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일부 학생들은 여전히 커뮤니티에 “최신 족보를 구한다”라는 글을 올리고 있고, 이를 보고 족보를 팔려는 이들 또한 나타나며 거래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족보, 왜 사라지지 않는가?

많은 학생들이 족보 문화가 나타나는 원인으로 매번 시험 문제를 바꾸지 않는 교수자의 잘못을 지적한다. 교수자가 매번 동일한 문제를 출제하면 당해 수업을 수강하는 사람의 일부와 이전에 그 수업을 들은 사람 사이에 문제 정보가 공유될 수밖에 없어 문제 정보를 가진 학생과 그렇지 못한 학생 간의 형평성 문제가 발생한다. 같은 문제가 출제되면서 학생들의 수업 참여 의욕이 떨어지는 일도 발생한다. H씨는 “족보만 보면 A 평점이 나오는데, 시간을 따로 들여서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라고 말했다. 학생의 수업 참여 의욕이 저하되면 수업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고, 이는 다시 학생 수업 참여 의욕 저하의 원인이 된다. 매번 같은 문제를 내는 것에 대한 교수자들의 고민이 필요한 이유다.

하지만 시험 문제를 매번 똑같이 낼 수밖에 없는 수업도 있다. 몇몇 교수자들은 과목 특성상 중요한 개념이 한정돼 있는 경우에는 문제를 비슷하게 낼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또한 수년간 교수자가 강의를 진행하면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가장 좋은 문제’가 정해져 있는 경우 문제를 바꾸는 것이 오히려 독이 된다는 지적도 있다. 더해, 학생들의 학습 부담을 경감하려는 목적으로 출제 방향과 문제를 정해 놓는 경우도 있다. 인문대의 한 교양 수업 강사는 “내가 수업에서 다루는 개념과 원리를 수강생들이 굉장히 낯설어 하는데, 시험 문제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공하고 출제유형을 고정하는 것이 수강생들의 학습 동기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치열한 성적 경쟁 속에서 학생들이 느끼는 성적 압박도 족보 문화 폐단의 원인으로 지적된다. J씨(경제학부)는 “족보의 영향력이 크게 없는 강의라도, 기출문제가 있으면 조금이라도 유리하기 때문에 다들 암암리에 족보를 구한다”라며 “좋은 성적을 받으려는 학생들에게 족보를 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상”이라고 말했다. 학생들의 치열한 성적 경쟁은 ‘줄 세우기’식 지엽적인 문제 출제로 이어지고, 이것은 또 학생들이 너도나도 족보를 구하게 하는 악순환을 초래한다. 신정철 교수(교육학과)는 “이 같은 상황이 교육적으로 올바른지 되돌아봐야 한다”라면서 “학습 성취도를 확인해 부족한 부분을 채우도록 학습을 도와주는 평가의 본래 기능이 변질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족보를 필수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문화가 학내에 만연해지면서 족보의 폐단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있다. 족보를 판매한 이들의 상당수는 “족보를 나누는 것은 좋으니까”, “커피값을 벌기 위해서”라며 족보 판매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족보를 구하는 것도 실력”이라 말하는 이들도 있다. 족보가 일상적으로 유통되고, 이에 대해 많은 학생들은 별 문제가 아니라고 여기는 상황이다.

 

족보, 어떻게 개선할 수 있나?

대학생들 사이에 족보 문화가 만연히 퍼져 있는 지금, 족보를 완전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족보로 인해 교육의 본질에서 멀어지거나, 불법적 금전 거래로 이어지는 등의 폐해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은 필요하다. 어떤 해결책이 있을지 살펴보자. 

먼저 시험 문제를 출제하는 교수자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다. 학내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족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수자가 시험 문제를 매 학기 새롭게 출제해야 한다”라는 식의 게시글이 올라오곤 한다. 중요한 개념이 정해져 있는 과목 등을 다루는 수업의 특성과 강의 형태를 고려하면 한계가 있다고 하지만, 학생들 사이에서 “(교수자가) 시험 문제를 토씨 하나 바꾸지 않는 것은 너무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교수자가 기출문제를 직접 공개하는 방법도 있다. 실제로 몇몇 교수자들은 수업시간에 기출문제를 공개한다. 하지만 이 경우, 교수자가 매번 시험문제를 새롭게 출제해야 하는 부담과 더불어 학생들이 수업에 흥미를 보이기보다는 기출문제 위주로만 공부하게 된다는 문제도 있다. 인문대의 한 교양 강의를 진행하는 A강사는 “강의 수강생들의 관심과 학습 동기를 지속적으로 유지시키면서, 강의가 정형화되지 않도록 수업을 운영하는 방법에 대한 고민은 교수자가 풀어야 할 과제”라고 말했다.

인맥과 돈이 없더라도 누구나 족보를 구할 수 있게 하자는 취지로, 암암리에 공유되던 족보를 학내 온라인 커뮤니티와 같은 사이트에 전체 공개하는 방법도 있다. 물론 서울대에도 스누라이프와 ‘SNU 족보 사이트’가 있지만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족보를 공유하는 시스템이다 보니 학내의 많은 족보를 모두 포괄할 만큼 활성화되지 않았다. 연세대 학내 커뮤니티 ‘연플’의 경우 본인이 갖고 있는 족보를 등록해야만 다른 족보를 볼 수 있도록 해 사이트를 활성화했다. 연세대 지승현 학생(전기전자공학부·15)은 “(연플에) 시험이 끝나면 즉시 족보가 올라와 사용이 편하다”라고 말했다. 

많은 해외 대학의 경우 학교 도서관 시스템을 통해 기출문제를 공개한다. 런던 정경대의 도서관 전산망에는 1994년부터의 기출문제가 저장돼 있어 학생이 언제든지 볼 수 있으며, 교수자는 도서관 전산망에 수업 기출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강의계획서에 고지해야 한다. 호주 뉴사우스웨일스대는 본부 소속의 시험 위원회가 시험지를 직접 모아 기출문제를 공개한다. 도쿄대의 경우 단과대 차원에서 직접 시험문제를 관리한다. 도쿄대 법학대에 재학 중인 마유 시노하라 씨는 “법대는 공정성을 위해 대부분의 기출문제를 온라인으로 제공한다”라고 말했다.

국내 대부분의 대학과 마찬가지로 서울대는 자체적으로 족보를 관리하고 있지 않다. 정상조 교수는 “궁극적으로는 학습권 보장을 위해서라도 (족보 문제에 대한) 학교의 해결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라며 족보 관리 제도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하지만 족보에 교수자의 저작권이 얽혀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또한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 설령 족보를 관리하는 시스템이 생기더라도 일부 기출문제가 암암리에 돌아다니고, 족보 문화의 문제점들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남는 상황이다.

 

족보를 보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수능 기출문제를 수백 번 푸는 고등학생들처럼, 대학생들 역시 시험에 대비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일 테다. 하지만 모두에게 공개되는 수능 기출문제와 달리, 몇몇 족보는 모두에게 공개되지 않는다. 당연한 관습이라는 이유로 대학생들이 공정의 원칙을 스스로 저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 볼 시점이다.

 

삽화: 유지원 기자 uz10913@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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