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학기, 카데바 실습을 해야 한다는 소식을 듣고도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도 소 눈알과 돼지 심장을 해부할 때 크게 힘들지 않았던 기억 때문일 것이다. 첫 카데바 실습 일이었던 지난 5월 8일, 지하철 2호선을 타고 혜화역에 내려 땀을 뻘뻘 흘리며 언덕을 넘어 학교에 갈 때까지도 별생각이 없었다. 실습실에 들어가 포르말린의 이상한 냄새가 겹쳐 쓴 두 개의 마스크를 뚫고 콧구멍으로 확 들어오자 왠지 모르게 등이 딱딱하고 차갑게 굳는 기분이었다. 철로 된 차가운 침상 위 하얀 천을 교수님이 걷어내자 눈을 감고 있는, 마치 자고 있는 것 같은 카데바를 볼 수 있었다. 되돌아보면 뭘 그렇게까지 놀랐을까 싶지만은,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의 바싹 마른 마지막 모습과 꼭 닮은 카데바가 의대생들이 앞서 해부를 해 놓은 탓에 근육과 뼈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 모습이 당시엔 큰 충격이었다. 그래도 수업 때 배웠던 근육들을 직접 찾고 관찰하는 것에 집중하다보니 놀랐던 마음이 가라앉았고, 실제 근육은 책 속 삽화와 꽤 달랐기에 실제로 보고 배울 수 있는 환경이 참 고맙기도 했다.

하지만 그날 이후 8월 중순까지, 석 달 정도의 기간 동안 나는 고기를 씹을 수 없었다. 첫 카데바 실습을 담담하게 잘 끝내고 왔다고 스스로 생각했지만, 실습실에서 봤던 장면이 문득문득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소크라테스의 삼단논법에 따르면 나는 사람이기에 언젠가 죽을 것이다. 그러면 나도 카데바와 크게 다를 바가 없을 텐데, 고기의 살결과 해부된 카데바의 그것은 너무도 똑같았고, 고기를 씹는 것이 마치 나의 일부를 씹는 것처럼 느껴졌기에 그것을 입에 넣을 수가 없었다. 고기는 생각보다 많은 음식에 들어있었다. 대부분의 식당 음식에는 고기가 들어있었고, 자취방에서 매일같이 먹던 180초 카레에서도 동그랗고 작은 고기를 발견했다. 누군가 잘만 먹던 고기를 어느 날 돌연 못 먹겠다고 하면 나 같아도 궁금했겠지만, “고기를 왜 안 먹냐”는 질문에 매번 답하는 것도 꽤 번거로웠다. 골 때리는 점은 “네가 고기를 못 먹으니까 고깃집은 가지 말자” 따위의 자연스러운 배려에서도 괜히 마음이 불편했다는 것이다.

다행히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면서 기억은 점점 옅어졌다. 카데바의 모습을 떠올리려고 아무리 애를 써 봐도 누군가 그 기억을 훔쳐 간 듯 떠오르지 않게 된 지난 8월 중순 즈음부터는 슬슬 고기를 씹을 수 있었다. 이제는 입에 넣고 꼭꼭 씹고 있더라도 그것과 그것이 같게 느껴지지 않는다. 지난 5월 8일에 같은 실습실에 있었던 주변 동기들에겐 별일이 없는 걸 보면, 별일이 아니었는데 뭘 그렇게 유난이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때의 나는 지금 고기를 씹어 먹고 있는 지금의 나를 보면 기겁했을 텐데, 지금의 나는 그때 고기를 씹기 무서워하는 내가 참 신기하다.

겉으로 보기엔 의도치 않은 채식일 수 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고기를 먹지 않은 것은 나의 선택이었다. 다른 채식주의자들처럼 환경을 위해, 동물권을 위해, 건강을 위해 채식을 한다는 멋진 이유는 아니었지만 ‘나와 같은 그것을 먹어도 되나’라는 질문이 뇌리에서 자꾸 스쳐서, 그래서 고기를 ̒못 먹기̓로 선택했던 것 같다. 고기를 맛있게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카데바의 모습이 내게서 다 지워졌고, 고민하던 질문이 더 고민되지 않는다. 그래도 아직 머릿속에는 질문으로 남아 있어서 어쩌다 가끔 생각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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