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욱 교수(불어불문학과)
김영욱 교수(불어불문학과)

몸담고 있는 학계의 동향을 소개해 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학계의 동향이라면 결국 새로 나온 책의 목록일 것이다. 그런데 신간이라고 해서 반드시 새로운 글과 새로운 주장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 여기 인문대다.) 특히 내가 속한 고전주의 시대 프랑스 문학 연구에서 새 책은 오히려 헌 책을 새로 정리하고 편집한 결과인 경우가 흔하고, 학계의 최신 동향은 이렇게 새로 나온 옛날 책의 목록으로 수렴되기도 한다.

내가 전공한 18세기 프랑스어권 작가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의 경우를 보자.

루소 텍스트 출판의 역사는 연구서 한 권의 주제가 될 정도로 방대하다.(Philip Stewart, Éditer Rousseau, Lyon, ENS Éditions, 2012) 나의 루소는 이 중에서도 1959년부터 1995년까지 총 다섯 권으로 파리의 갈리마르(Gallimard) 출판사에서 간행된 플레이아드(Pléiade) 총서의 비평판 전집에 근거한다. 이 전집은 오랫동안 정리되고 발굴된 루소의 원고들과 20세기 초부터 갱신되고 있던 현대 루소 연구의 성과들이 집약된 결과였다. 2008년 박사과정을 시작한 나는, 플레이아드 전집에 편집자 혹은 주석자로 이름을 올린 연구자들을 통해 루소를 읽고 배웠다. 이들은 여러 판본과 수고본을 종합하여 루소의 문장과 문자를 확정하였고, 이를 위해 루소가 쓰다 만 문장과 지워버린 문자까지 복구했다. 이들은 250년에 이르는 루소 해석의 역사에서 자신의 위치를 의식하였고, 미래의 독자와 연구자를 위한 고민과 기대를 수많은 주석으로 기록했으며, 이를 위해 수고본의 종이 색깔과 재질에도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이와 더불어 영불해협 건너에서 리(R.A. Leigh)가 1965년에서 1998년까지 총 52권으로 루소 편지 전집을 편찬한 사실도 빼놓을 수 없다.

플레이아드 전집과 리의 편지 전집은 루소를 다시, 새롭게 읽도록 했으며, 57권의 책으로부터 새로운 세대의 연구자들이 생산되었다. 그리고 내가 학위 취득의 성공과 실패 가능성을 사고실험하고 있던 2012년, 루소 탄생 300주년을 맞아 플레이아드의 거인들 발밑에서도 허리를 펼 줄 알았던 연구자들이 또 다른 전집을 펴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두 종이었다. 우선 제네바의 출판사 슬라트킨(Slatkine)이 편지 일곱 권을 포함하여 총 열일곱 권으로 구성된 전집을 완간했으며, 파리의 클라식 가르니에(Classiques Garnier)는 총 스물한 권을 향해 긴 여정을 시작했다. 이제 사소한 이본과 단편 외에 새로 덧붙일 것도 없는데, 그것도 두 종의 전집이라니? 그런데 두 전집은 상이한 형식과 구성만으로 옛날 책을 새로 낼 때의 곤란함을, 다음 세대를 위해 준비할 독서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슬라트킨 전집이 실증주의적 연구에서 따라갈 수 없는 대가의 책임 아래 효율적인 방식으로, 플레이아드 전집과 같이 주제 혹은 장르에 따라 텍스트를 분류하면서, 자유로운 해석에 방해가 될지 모르는 수다를 삼가려고 애쓴다면, 클라식 가르니에는 다양한 분과의 다양한 해석을 다투는 현대 연구자들을 섭외하여, 텍스트를 그것이 작성되거나 출판된 연도에 따라 나누고 모아, 플레이아드 판과 겨룰만한 주석의 활기를 북돋고 있다. 무엇보다 제네바와 파리에서 근거지를 둔 두 전집은, 18세기 칼뱅주의 소공화국이었던 소박한 도시와 가톨릭 절대왕정 국가의 수도로서 당시 유럽의 문명을 대표하던 도시 사이에서 살고, 쓰고, 읽혔던 루소의 지정학적 구도를 상기시켜 흥미롭다.

다음 세대에게 루소는 어떤 작가이고 어떤 철학자일까? 그들은 어떤 루소를 상상하며 어떤 방법으로 루소의 이름이 붙은 텍스트를 편집하고 출판하게 될까? (주소지가 파리인 전집은 이제 고작 네 권이 나왔으므로, 아마 나는 그 결과를 보지 못할 수도 있겠다.) 이와 같이 모든 세대에게 루소의 문장과 문자는 외면적인 동일성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역사적인, 상호주관적인 대상이다. 이렇게 루소는 새로 나온 옛날 책을 통해 또 다른 삶을 얻고, 루소를 공부한 나도, 아주 작은 일부겠지만, 그 삶을 공유한다. 따라서 고전 연구자에게 새로운 전집, 새로운 비평판의 출판보다 더 중요한 동향은 있기 어렵다.

그래서 내가 보고할 동향은 다음과 같다. 1998년에 첫 번째 책이 나온 몽테스키외(Montesquieu, 1689-1755) 전집은 스물두 권 중 스무 번째 책을, 1968년 시작된 볼테르(Voltaire, 1694-1778) 전집은 전체 203권 중 199번째 책을 기다리고 있다. 50여권으로 완결될 달랑베르(d’Alembert, 1717-1783) 전집은 일곱 번째 책을 준비하고 있으며, 점점 더 (내게) 중요한 작가가 되고 있는 스탈(Staël, 1766-1817)의 전집은 열 권 중 아홉 번째 책을 바라본다. 반면 1975년 출발한 에르만(Hermann) 출판사의 디드로(Diderot, 1713-1784) 전집은 서른세 권 중 스물네 번째 책도 보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온전하지 않아도, 이 전집은 디드로와 디드로 연구자들의 삶을 갱신하는 일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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