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겪고 있는 지금 팬데믹 시대에는 두 가지가 빠져 있다는 동료의 말을 기억한다. 하나는 확진자의 목소리, 다른 하나는 사망자에 대한 애도. 2014년 세월호 참사 때를 상기해 보면 재난 당사자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감각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전염병이 진정으로 두려운 까닭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방역과 생존이라는 대의 속에서 확진자는 전염병의 숙주가 되고, 희생자는 전광판의 숫자가 된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는 비감염자들의 일상 또한 평준화한 것처럼 보인다. 모두가 한결같이 칩거, 마스크, 온라인 전환이라는 공통의 화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코로나 블루’라는 보편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공통’과 ‘보편’의 서사 속에 보이지 않는 얼굴과 들리지 않는 목소리들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확진자나 밀접 접촉자들처럼 커뮤니케이션의 공간으로부터 유폐된 사람들, 언택트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 더욱 고전적으로 노동하고 있는 사람들, 집이 안전하지 않거나 머무를 집이 없는 사람들, 방문자 명단에 적을 핸드폰 번호가 없는 사람들. 재난이 닥쳐올 때 그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가 드러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나 그 약한 고리에 속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어떻게 드러낼 것이냐의 문제는 아직 우리 사회에서 충분히 숙고되지 않은 듯하다. 

그런 맥락에서 『대학신문』과 같은 커뮤니티 언론지는 코로나19 이전보다 더욱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됐다고 할 수 있다. 신문 지면상에 가지런히 배열된 기사란은 하나하나가 누군가에게 주어진 발언의 무대이다. 달리 말해 누구에게 그 무대가 필요한지, 누가 무대에 올라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것도 언론지의 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지난 2011호의 1면을 장식한 ‘코로나19 특별장학금’ 기사는 발언권의 분배라는 문제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만들었다. 등록금 반환이 아니라 장학금 수혜라는 결론에 만족할 수 없는 사람들, 그 장학금에서조차 제외된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아낸 것은 의미 있었다. 그러나 ‘장려’와 ‘구호’라는 워딩으로 정리된 이번 협상안이 과연 긍정과 부정의 반응을 고루 평등하게 소개하는 것으로 충분한 이슈였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후속 호에서 더 많은 이견과 주장을 취재하고 담아낼 수 있기를 바라본다. 

코로나19 이후의 돌봄 노동에 대한 칼럼(13면)과 학생 자치 활동의 위축 문제를 지적한 사설(15면)은 인상 깊었다. 사실상 포스트 코로나 사회는 더 이상 ‘사회적으로’ 거리를 둘 수 없는 최소 단위의 공간과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돌봄 노동에 의존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봄 노동자가 겪는 육체적·정신적 고통은 긴급한 문제로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돌봄의 사각지대, 여성에게 편향된 가정 내 돌봄 노동과 그것의 비가시화, 저임금과 저평가에 시달리는 돌봄 노동자”라는 지점들을 적확하게 짚어내고 있는 유예현 간사의 칼럼은 시의적인 목소리라 생각된다. 

마찬가지로 코로나19 이후 자치 활동이 약화되면서 대학이 “수업의 공간”으로 후퇴하고 있음을 지적한 사설 또한 예리한 문제 제기라 보았다. 자치는 대학의 가장 약한 고리 중 하나이다. 글쓴이는 대학 본부의 정책적 고민을 요구하고 있으나,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자치 공동체를 구성하는 모든 단위가 캠퍼스라는 공간을 재구성하고 새로운 사용법을 고안해 내기 위한 모색 과정에 참여할 수밖에 없으리라 본다. 

코로나19로 인해 모두가 불행해졌다는 말에 자족하는 대신 당장 연결의 힘을 잃어 가는 주변의 약한 고리들을 향해 눈을 돌려야 하는 시점이다. 글쓰기 강의 오리엔테이션에서 늘상 하는 말이지만 글은 고립과 망각에 저항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대학신문』과 같은 언론지가 보이지 않는 공간과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연결해 주는 역할을 묵묵히, 지치지 않고 수행해 주길 바라본다.

 

김민조 강사

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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