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민애 강사(기초교육원)
나민애 교수(기초교육원)

화상 강의를 한 지 벌써 두 학기째가 돼 간다. 아무리 인터넷 강의에 익숙한 학생들이라고 해도 지겹지 않을 리 없다. 가르치는 입장에서도 오래 할 일이 못 된다.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떠들다 화상 창을 닫으면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식의 ‘현타’가 온다. 암울한 시대의 유일한 다행이라고는 현장 강의의 소중함을 새삼 깨달았다는 점이다. 미래 유망 직업군 리스트에서 교사가 사라졌다는데 ZOOM 수업을 하는 요즘, 오히려 반대의 희망이 생겼다. 아무리 IT와 언택트가 강세가 된다고 해도, 4차가 아니라 4차 할아버지 혁명이 온다고 해도, 강단의 ‘살아 숨 쉬는’ 선생은 여전히 필요할 것이라는 믿음이 생긴 것이다. ‘녹강’(녹화 강의)으로 충족되지 못하는 부분은 분명히 있다. 수업은 지식의 전달만이 아니고, 사람은 언어라는 기호로만 소통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우리의 캠퍼스는 사람이 고프다. 

이 고픈 사람들 중에서도 올해 대학 1학년 학생들이 제일 안타깝다. 사실 여기에는 사심이 조금 깃들어 있다. 우리집에도 신입생이 있기 때문에 ‘코로나 시대의 입학이란 무엇인가’를 간접 체험 중이다. 차이가 있다면 이 아이는 대학 신입생이 아니라 초등학교 입학생이라는 것이다. 우리집 막내 입장에서는 올해가 인생 최초의 공교육 영접이었다.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첫 스텝부터 화끈하게 망해 버렸다. 줄긋기도 모르고 줄서기도 모르고 줄넘기도 모르는, 1학년 같지 않은 1학년이 돼 버린 것이다. 다행히 우리집 어린이에게는 초등학교 라이프에 대한 로망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대학 1학년생들은 다르지 않은가. 사복! 미팅! 캠퍼스 라이프! 자유! 그들은 이 희미한 로망만으로 지난 3년을 버텨왔을 터. 그런데도 로망을 더 유예하라는 엄명이 떨어졌으니 답답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며칠 전에는 ‘1학기 ZOOM 수업에서 뭐가 제일 좋았어요? 어떤 방식이 좋았어요?’ 우리 대학 신입생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토론 수업이 좋았다는 답변이 제일 많았다. 작년에는 조별토론 좋다는 친구들이 많지 않았다. 학번이 달라지면 토론에 대한 성향이 휙 바뀌는 것일까. 아닐 텐데. 화상에서 하는 토론이 뭐 엄청 특별한 것일까? 그것도 아닐 텐데. 아아, 아마도 이들 역시 사람이 고픈 것이리라. ZOOM에서 우리는 선명치 않은 화면으로 분명치 않은 얼굴을 보고, 기계를 통과해 온 목소리를 듣는다. 그것이나마 반가운 우리다. 이쪽의 대학생은 저쪽의 대학생이 신기하고 반갑다. 나만 해도 그렇다. 수업에서 학생이 웃어주면 그가 음소거 상태일지라도 퍽 감사하다. 

예년과 달리 토론이 좋다는 특별한 신입생을 바라보자니, 학교에 오지 않아서 『대학신문』도 덜 읽을 우리 신입생을 생각하자니, 지난 나의 대학 1학년 기억과 내 아들의 1학년을 모아 모든 대학 1학년을 축복하고 싶어진다. 실로 청춘이야말로 축복받아 마땅하지 않은가. 1학년, 갓 스물의 나이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나이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2020)라는 제목의 드라마가 요즘 방영되던데, 이 표현이야말로 바로 20대 그들의 것이다. 

사실 이 드라마의 제목은 오래전에 쓰인, 그리고 이미 죽고 없는 한 시인의 작품에서 나왔다. 윤동주 시인을 몹시 경애했다고 알려진 이바라기 노리코가 시 「내가 가장 예뻤을 때」(1958)를 썼다. 그리고 이 제목을 빌려 공선옥 소설가가 『내가 가장 예뻤을 때』(2009)라는 소설을 썼다. 최근에는 이은규 시인 역시 이 제목을 빌려 「내가 가장 예뻤을 때」(2019)라는 시를 썼다. 그러니까 같은 제목으로 일본 시인의 시, 한국 소설가의 소설, 한국 시인의 시, 한국 드라마가 있는 셈이다. 다른 장르의 각기 다른 텍스트들은 공통적으로 청춘이 달콤하면서도 참 씁쓸하고 외롭다는 사실을 다루고 있다. 청춘이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찾아온다. 그런데 우리가 가장 예뻤을 때 우리는 우리가 예쁜 줄 모르고 산다. 그리고 지나서야 그때가 찬란했음을 깨닫게 된다. 왜 모든 좋고 아름다운 기억은 사후적으로 구성되는지 모르겠다. 우리의 올해도 그렇게 될까. 겪을 때는 고단하기만 한 것이 지나고 나서는 아름답게 기억될까. 안타깝게도 이바라기 노리코는 가장 예뻤을 때, 불행하고 모자랐으며 쓸쓸했다고 적었다. 첫 번째 ‘내가 가장 예뻤을 때’ 텍스트는 분명 그랬지만, 이 제목으로 모든 각자는 서로 다른 인생의 일기를 쓸 것이다. 하여, 우리가 다음에 창작할 ‘내가 가장 예뻤을 때’에 희망을 걸어본다. 부디 이바라기 노리코의 슬픔과는 반대가 되기를 바라는 2020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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