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갑 교수(서양사학과)
이두갑 교수(서양사학과)

최근 미국 대통령 트럼프는 자신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의 위험에도 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국가가 필요한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진전해 나간 “전선에 나선 지도자”, 그리고 바이러스를 극복한 팬데믹 시대의 영웅이라는 나르시스트적인 트윗을 남겼다. 자신은 전염병에 대한 방역 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못한 대통령이 아니며, 오히려 위험을 무릅쓰고 “바이러스가 자신의 삶을 주도하지 못하는” 용기 있는 리더로서 이에 대처해 나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에 대한 정당한 보답으로 자신이 바이러스를 극복하며 이에 대한 면역을 획득하리라 전망했다. 

트럼프의 주장은 당혹스럽지만, 역사상 전염병의 시기에 이에 대한 면역을 얻은 이들은 언제나 이를 자신의 정치·경제적, 그리고 도덕적 우위를 보여주는 것이라 역설했다. 의학사학자 캐스린 올리바리우스는 19세기 미국 남부에서 치사율이 50%에 달했던 황열병에 대한 면역을 얻은 이들이 면역-자본이라 할 만한 것을 얻었다고 지적했다. 

일례로 면역을 얻은 사업가들은 은행에서 저금리의 대출을 받고 사업을 확장해 나갈 기회를 얻었으며, 면역을 부여받은 정치인들은 신의 축복을 받고 전염병과 죽음의 시대를 헤쳐나갈 시대의 영웅이라며 자신들의 정치적 위치를 공고하게 했다. 반면 임금이 필요했던 노동자들은 면역을 얻기 위해 치사율이 50%에 달하는 황열병에 일부러 걸려 면역을 얻고자 하는 죽음의 모험을 감행해야 했다. 끊임없는 노동으로 질병에 감염됐지만 우연히 면역을 얻어 살아남은 노예들은 그 가치가 50%가량 증가해 백인들의 농장 확장의 담보로 사용되며 더 예속된 처지가 됐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자본주의가 “과거가 미래를 먹어치우는” 경향, 즉 자본의 축적을 통해 미래를 지배하는 자본가의 지위를 공고하게 하는 역사적 경향을 가져왔음을 지적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전염병의 시대에, 면역-자본을 축적한 이들은 기존의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위계질서를 더욱 공고히 했다. 전염병은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무작위적으로 질병과 죽음을 가져다주는 “위대한 평등자”가 아니라 오히려 팬데믹 이후의 사회 질서를 보다 위계적으로 만드는 비극적인 것이었다. 

과학기술사 학자들이 그리는 질병과 인류의 관계에 대한 역사는 코로나 팬데믹을 이해하고, 그 이후 나타날 사회를 전망하는 데 어떠한 함의를 줄 수 있는가? 의학사학자 찰스 로젠버그는 펜데믹이 과학과 의학의 혁신, 그리고 정보와 시민사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찬 극복의 순간을 맞기보다는 지속적인 흐느낌과 체념을 통해 서서히 사라져갈 뿐이었다고 지적했다. 일례로 20세기 후반 에이즈 사례에서 극명하게 나타나듯이 팬데믹이 가져온 급격한 사회 변화를 충격적으로 경험한 살아남은 이들은 오히려 질병의 희생자들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며 이들을 오히려 감염의 원인이자 사라져야 할 이들로 간주하기도 했다. 그리고 면역-자본을 얻은 이들은 이러한 희생자들에 대한 낙인을 통해 자신의 지위를 정당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더욱 위계적인 사회를 건설해 나가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면역-자본과 포스트-팬데믹 사회에 대한 분석은 코로나 팬데믹에 대응하고 이후 사회를 전망하는 작업에서 질병으로 인한 상처와 상흔들이 무차별적으로 우리 사회에 각인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팬데믹에 대한 대응에서 우리는 백신과 같은 과학·기술적 면역에의 추구에 큰 기대를 하고 있다. 그렇지만 현대 생의학의 역사상 가장 이른 시일 내에 개발된 백신은 거의 5년에 가까운 개발과 임상 실험을 거쳤고, 코로나19와 같은 RNA 바이러스에 대한 백신은 아직 개발된 적이 없다는 점을 냉철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에 백신 혁신에 대한 투자 만큼이나 팬데믹이 어떻게 우리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위계에 따라 취약자들을 얼마나 구조적으로 황폐화하며 고통에 빠지게 하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고 이들에 대한 돌봄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겠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