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원 기자 uz10913@snu.ac.kr
유지원 기자 uz10913@snu.ac.kr

 

중학생 시절 도 교육청에서 주최한 독서토론대회에 출전한 적이 있었다. 토론의 논제는 백릉(白菱) 채만식의 소설  『논 이야기』의 주인공 ‘한덕문’의 행적을 비판 또는 옹호하라는 것이었다.

한덕문의 아버지는 피땀으로 논 스무 마지기를 일구어 놓았다. 그러나 구한말 탐관오리의 수탈에 그 중 열세 마지기를 빼앗기고, 남은 일곱 마지기는 한덕문이 일본인 투기꾼에게 팔아버려 가산은 모조리 없어지고 말았다. 소작농으로 근근히 연명하던 한덕문은 일본이 언젠가 쫓겨가는 날이면 논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호언하며 서른 다섯 해를 보냈다. 결국 해방이 되어 적산(敵産)이 반환된다는 소식에 그는 한껏 기대를 품었지만, 유상불하(有償拂下) 방침에 좌절하며 “나라 명색이 내게 무얼 해준 게 있길래… 난 오늘버틈 도루 나라 없는 백성이네”라 일갈한다.

한창 애국심과 국가주의적 열정에 불타오르던(?) 나는 소설에서 드러난 한덕문의 행태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충성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국민까지 국가가 보호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주장했다. 부당한 수탈을 당한 데에야 억울한 측면이 있지만서도, 본인의 자유의사에 따라 투기꾼에게 팔아넘긴 논을 무상으로 돌려주지 않는다 해서 ‘나라 없는 백성’을 자처한 그를 당시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의 완고했던 국가주의적 사고는 대학 교육을 받으며 조금씩 완화됐다. 정치외교학을 공부하면서 국가와 국민의 관계가 일방적인 충성과 보호의 논리 이상으로 복잡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고, 양자 간의 권리와 의무는 확고부동하게 정해진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구성(construction)돼 가는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자국민을 보호하지 못하는 국가에 국민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조국에 충성하지 않는 국민을 국가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국가-국민 관계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을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구해가며, 지속적으로 재정의되고 변화하는 것일 터이다.

최근 발생한 이른바 ‘서해상 공무원 피살사건’의 추이를 지켜보는 내 뇌리에는 이 같은 질문이 계속 남아 있다. 자국민 구출 노력을 소홀히 했다고 안보당국의 ‘무능’을 비판하고픈 생각은 없다.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3년간의 정보병과 근무를 통해, 실시간 중계되는 상황도를 보며 지휘부가 즉각 결심을 내리는 모습이 영화 속 가상현실에 불과함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출처의 첩보를 비교 분석하며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생산하는 일에는 일정한 시간이 소요되는데, 그 사이에 비무장 상태의 탈진자에게 그렇게까지 총격을 가하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피해자를 월북(越北) 시도 중 사살당한 이로 단정하며 자국을 배반하려 한 국민까지 보호해 줄 의무는 없다는 주장이, 또 다른 형태의 국가주의적 ‘색깔론’일 수 있음은 지적하고 싶다. 피해자가 월북 의도를 가지고 있었냐는 사실관계조차 현재로서는 확증할 수 없을 뿐더러, 설사 월북을 기도했다 한들 그가 당한 참혹한 죽음이 이로 인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조국을 배신하려 한 이에게 내려진 가혹한 운명이 당연하다는 사고는 과거 권위주의 시절 횡행했던 ‘빨갱이 척결’의 논리와 진배없다.

2000년대 이후 발생한 북한의 무력행사는, 대부분 강력한 규탄과 진상조사 요구가 불발되고 나면 ‘남북관계의 불행한 사건’들 중 하나로 사그라들기 일쑤였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이번 사건도 그렇게 마무리될 공산이 크다. 다만 이 비극을 계기로 국가-국민 관계에 대한 새로운 성찰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국민을 보호하는 국가의 역할은 어디까지이고 또 국가에 대한 국민의 책무는 어디까지일지, 정치적 유·불리를 떠나 진지하게 되짚어보기를 바란다.

 

고용준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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