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연못 위를 둥둥거리는 오리의 뽀얀 깃과 유연한 자세로 서서 경계하는 길고양이의 눈빛과 무성히 자란 풀밭에 놓인 포획 틀 속 언젠가 들개가 지나갔던 흔적을 보았다. 오리를 돌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길고양이의 안부를 살피는 일이 일상이 된 사람들을 만나고, 들개의 사정을 이해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짐작하다 보니 여름은 갔다. 가을이 왔고 나는 자판을 두드려 그간 전해 들은 오리와 길고양이와 들개에 관한 이야기를 한데 묶었으며 글 뭉치는 나와 정성스러운 몇 사람의 손길을 번갈아 거친 후 완고가 됐다. 사진이 완고 주변에 정갈히 배치되자 마침내 한국식 베를리너판 한 면은 들썩한 모양새를 갖췄고 그제야 나는 텍스트를 기사라 불렀다. 내가 처음 써냈던 글 뭉치는 많은 이들의 노고가 더해진 뒤에야 여름에서 가을로 놓인 내 몰골과는 사뭇 다른 매무새를 띠게 된 것이다.

다만 동물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동물에 관한 기사를 순조롭게 작성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던 호기는 며칠도 못 갔다. 세 동물을 하나로 묶는 주제 의식이 불명확하다는 피드백과 핸드폰 스피커 속 탐탁스럽지 않은 듯한 음성과 좀처럼 발견할 수 없는 들개와 몇 번의 두드림 끝에 간신히 얻은 답변 같은 것들이 깜빡 떠오른다. 좋은 기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로 좋은 기사를 써보겠다고 다짐했던 시간은 훌쩍 곁을 떠났고 기사 발행일 전까지 어떻게든 원고 마감을 해야 한다는 불안이 지긋이 옆에 남아 있었다. 취재가 마무리될 무렵, 써서 알려야 할 이야기가 많다고 생각하고 자판을 두드리고 나면 종이의 여백은 내게 물었다. 너도 잘 모르면서 휘갈긴 문장은 없느냐고, 이것보다 잘 설명할 수 있지 않으냐고, 강조해도 모자랄 내용을 잊어버리고 쓰지도 않은 건 아니냐고.

겁먹은 채로 쓰인 글은 한데 모여 뭉텅이가 됐고 나는 들개와 길고양이와 오리를 만나기 위해 다시 한번 걸음을 옮겼다. 시월이었고 들개는 소리소문 없었으며 고양이들은 그날따라 다들 뭐가 그리 바빴던지. 오리만이 무던한 모습으로 연못에 있었고 나는 그게 참 다행이라고 여기며 수면 아래 그의 발길질을 한참 바라봤다. 오리가 있고 길고양이가 있고 들개가 있어 이야기는 시작될 수 있었다. 오리와 길고양이와 들개의 시간을 위해 고심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어 글은 쓰일 수 있었다. 나는 다만 오리와 길고양이와 들개가 보여주고 사람들이 들려준 것을 겨우 옮겨냈을 뿐이었다. 너는 다만 글 몇 줄 쓰고 나면 다신 여기 안 올 거지, 오리가 묻는다면, 이제 길고양이의 어려움을 해결할 방안을 알게 됐는데 앞으로는 어떡하실 건가요, 누군가 건넨다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할 테다.

글은 쓰였는데 나는 망설인다. 동물의 처지를 겨우 짐작할 뿐이라서, 좋은 기사를 쓰지 못한 것 같아서, 개선 방안에 관해 쓰는 것이 내 일의 끝이라 생각하고 말까 봐서. 오리와 길고양이와 들개와 무언갈 좋아한다는 마음으로 부딪히는 한계와 그 너머에 관해 부지런히 골몰한 뒤에야 나는 좋은 기사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어렴풋이나마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골몰하는 동안에도 가을은 가고 계속해서 글은 쓰일 테다. 부족한 글과 미덥잖은 푸념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함께 기사를 완성해준 이다경 취재부장님과 김가연 기자님, 그 외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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