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지하철 사람들에게는 표정이 없다. 새벽 여섯 시 반, 기계적인 몸짓으로 나갈 채비를 마치고 전철로 빠져나왔을 사람들. 무신경한 시선들이 전철 안을 메운다. 저마다의 시선은 좁다란 스마트폰 안으로 고정된다. 누군가는 뉴스 헤드라인을 대충 훑다가 그만두고, 누군가는 쇼핑몰 앱 속 화려한 장신구와 의류로 시선을 돌린다. 대림에서 신도림으로, 신도림에서 합정으로 넘어갈 때마다 허공에 떠도는 무신경한 숨도 자연스레 늘어난다. 시선과 숨들이 잔뜩 부딪힌다. 소리 없는 짜증도 함께 쌓인다. 출퇴근 시간 지하철에서 내가 마주했던 사람들에게는 표정이 없었다.

그런 사람들로부터 얼굴의 흔적을 찾고자 시작한 기획이었다. 그들과 함께, 사회의 이면으로 사라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살펴보면 좋겠다고 느꼈다. 모두의 목소리를 들어보고 싶었다. 소설이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의 시선으로 사람의 궤적을 살피는 장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문학에서 현대인을 상징하는 키워드들은 다음과 같다. ‘개인주의’, ‘물욕’, ‘탈정치’. 세 가지 키워드에 서려 있는 전제가 하나 있다. 현대인은, 특히 대도시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은 삭막하고 이기적인 존재라는 것. 자신의 안위를 보살피는 일에 몰두한 탓에 사회적, 정치적인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산업화 시대의 문단은 이들에게 ‘소시민’이란 이름을 붙여줬다. 한창 도시 개발이 공격적으로 이뤄지던 시기, 문단의 관심사는 도시화 과정에서 소외됐던 철거민과 이주 노동자 문제에 있었다. 그들은 산업화라는 가면 뒤에 숨겨진 참혹한 상흔들로 묘사됐다. 이에 반해 도시에서 삶을 꾸린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향기에 심취한 이기적인 소시민으로 그려지고는 했다. 이웃을 배려할 줄 모르고, 공동체 윤리를 냉소하며 자신의 물욕을 채우기에만 바쁜 존재로 말이다. 문단만이 아니었다. 연대를 외치는 운동가들도 이들의 무관심이 ‘진짜’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소외를 낳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인파로 어지러운 지하철을 드나들 때마다 그런 지적이 어쩐지 잔인하게 느껴졌다. 얼굴 없는 표정들의 시선을 따라갈 때마다, 가면 뒤에 존재할 저마다의 사정들이 떠올랐다. 생계를 책임지기에 빠듯한 사람, 월세와 관리비 폭탄에 시달리는 사람, 과로와 박봉에 시달리는 사람. 분명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어려움에 시달리며 피곤한 출퇴근길을 오갈 존재들. 이들의 숨은 끊어질 위기에서만 자유로울 뿐, 삶을 건강히 메우기에는 여전히 모자라다. 도시의 변두리로 밀려난 진짜 가난한 사람이건, 그렇지 않은 도시인이건. 대부분의 사람이 제각각의 결핍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었다. 나의 결핍과 타인의 결핍을 비교하며 편을 가르는 게 무의미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취재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주제가 너무 어렵다며 인터뷰 요청을 거절하신 분들이 많았다. 취재에 응하신 분들도 내게 호기심을 갖고는 했다. 빈곤을 더이상 활발하게 논하지 않는 사회에서, 어쩌다 이런 기사를 쓸 생각을 했는지. 그냥, 그 많은 사람의 마음에 존재할 결핍을 들춰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홀가분하다. 몇 달 동안 밀린 숙제를 마침내 끝낸 기분이다. 누군가는 계속해서 이 주제를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신문사에서는 그 누군가가 나였던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심심한 수고의 말을 건네 본다. 최선을 다해 문장의 기름기를 빼 주신 학외부장에게도 감사의 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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