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혜림(인류학과 석사과정)
황혜림(인류학과 석사과정)

“우리 여름이 끝나기 전에 꼭 만나자.”

이 한마디 말이 이렇게 기약 없이 느껴진 적이 있던가. 햇빛 쨍쨍하던 늦여름에 두꺼운 마스크를 쓰고 집 앞 공원을 걸으며 생각했다. 여름이 끝나기 전에 꼭 만나자고 약속했는데. 선뜻 찾아온 가을바람을 맞으며 울 것 같은 기분이 됐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정한 공간에서 맛있는 걸 먹고 한강 공원에 누워 음악을 들으며 맑은 공기를 마시던 일상이 지나버린 한 시절이 되어버린 지금에야, 나는 우리가 서로 강하게 연결되어 있었음을 느낀다. 아무렇지 않게 강의실에 모여서 함께 듣던 수업, 쉬는 시간에 나누던 소소한 이야기들, 수업이 끝나고 맛없는 커피 한 잔을 사서 햇빛을 받으며 자하연에 앉아 있던 그 시간이 얼마나 나를 생의 에너지로 채웠는지. 그게 없어진 지금의 삶은 얼마나 재미가 없는지.

우리는 다른 존재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너와 나의 다른 점은 거울처럼 나를 비춘다. 내가 사랑하는 너의 어떤 점에 대해 한참을 곱씹다 보면 어느새 나의 일부가 이전과 달라졌음을 느낀다. 특별할 것 없는 사소한 것들을 너에게 이야기하면서 웃고 떠들다 보면 어느새 그것은 중요한 의미가 되어 마음속에 박힌다. 그렇게 하루의 디테일은 살아나고 삶의 경험은 아름다운 색채들을 부여받는다. 밖으로 쉽사리 나가지 못하고 방안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나와 연결돼 있는, 또는 연결됐던 사람들의 모습이 불빛처럼 떠오른다. 내가 일상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연결돼 살았던가 생각한다. 나는 마치 수많은 사람들이 걸어간 길로 이뤄진 교차로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내 삶을 이루고 있는 것은 사람뿐만은 아니다. 이번 여름에는 비가 많이 왔다. 유난히 긴 장마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기후 위기의 한가운데에서 자꾸만 마음이 축축해졌다. 뉴스에서는 알래스카 빙하가 녹아 주민들이 대피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폭우에 축사가 떠내려가면서 소들이 물살에 휩쓸려 가는 영상을 봤다. 마음이 젖어 드는 것을 바라보며 ‘우리는 이렇게도 연결돼 있구나’ 느낀다. 그동안 마음 밖에 있던 존재들과의 연결감을 깨닫는 과정 속에서 마음은 자꾸만 엉겨 붙고 생각은 뻗어 나간다. 사람들이 외출을 하지 않으면서 플라스틱 소비가 늘었다고 하던데 계속 이런 방식으로 살아도 되는 걸까. 퍼붓는 비는 무언가 말하고 있는데, 계속해서 너의 말을 외면해도 되는 걸까. 내가 먹고 쓰는 모든 것들이 어떤 존재들에게 폭력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언젠가처럼, 매일 마시는 커피의 플라스틱 빨대가 누군가에게 죽음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됐던 언젠가처럼 마음이 한없이 울렁거린다.

마음에 선을 그어 버리면 사는 것은 조금 더 쉽다. 너와 내가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삶의 지형도는 전과는 다르게 짜이고 신경 쓸 것이 점점 더 많아진다. 그렇지만 너로 인해, 내 삶을 구성하고 있는 다른 존재들로 인해 내 삶은 더 풍요로워진다. 방에 혼자 앉아 삶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불빛을 가만가만 짚어 보면서, 어느 때보다도 더 우리가 연결돼 있음을 느낀다.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맞닿아 있다면, 나는 나와 닿아 있는 존재들을 더 정확한 방식으로 사랑하고 싶다.”* 우리가 잘못 연결돼 있다면 너무 늦기 전에 그 방식을 바로잡고 싶다. 나는 계속해서 너의 말에 귀 기울이고 싶다. 우리 내년 여름에는 꼭 웃으며 만나자. 

*해당 문장은 신형철의 『정확한 사랑의 실험』(2014)에서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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