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적 자원의 부족으로 인간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은 상태를 가리키는 단어, ‘빈곤’은 어떤 사회에서건 핵심적인 논쟁거리였다. 사회는 소득·직업·재산 등의 객관적인 기준을 바탕으로 빈곤을 규정해 왔다. 반면 문학, 그중에서도 특정한 시공간적 배경과 인물을 통해 서사를 전개하는 ‘소설’은 그와는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한다. 소설은 시대적 현실을 바라보는 분석과 시선을 심층적으로 풀어낸다. 『대학신문』은 규정된 기준 이면의 이야기를 ‘인간적으로’ 풀이하는 방식으로서 소설에 주목해, 소설에서 빈곤의 문제가 어떻게 조명돼 왔는지 살펴봤다.

 

산업화 시대 소설이 포착한 변두리의 존재, 도시 빈민

 

"… 식칼 자국이 난 표찰, 아침 수저를 놓고 가슴을 세 번 치게 한 철거 계고장, 집을 헐값에 버리기 위해 생전 처음 내 본 인감 증명 두 통, 미리 서명해 두었던 명의 변경 신청서, 힘 하나 없는 식구들의 이름과 나이가 차례대로 적혀 있는 주민등록 등본 두 통, 마당가 팬지꽃 앞에 앉아 있던 영희가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가 그것을 받았다. 꼭 삼 초 동안 들고 있다가 어머니에게 넘겨 주었다. 어머니는 두 손으로 받아들었다."

- 조세희,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1976) 중

 

한국소설이 빈곤 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소위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1970·80년대의 산업화 시대부터였다. 경제 개발 과정에서 산업 구조가 공업 중심으로 개편되자, 도시에는 공장이 들어섰고 일자리를 찾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도시행을 택했다. 그러나 도시가 비대해지는 만큼 제대로 된 거처를 갖지 못하고 일용직을 전전하는 등 생계의 위협에 시달리는 사람, 이른바 ‘도시 빈민’의 숫자도 늘어났다. 그리고 이들 중 상당수는 삶을 지속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의식주를 충족하지 못하는 ‘절대적 빈곤’에 시달렸다. 류보선 교수(군산대 국어국문학과)는 “빈곤 문제는 산업화 사회의 큰 결함으로서 문단의 주된 관심사로 자리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설명했다. 

이 시기에 소설들은 대도시의 발전 속에 묻힌 빈민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들춰내고자 노력했다. 나보령 강사(국어국문학과)는 “산업화 시대 한국문학의 핵심 주제의식 중 하나는 이처럼 변두리로 밀려나는 도시 저소득층과 떠돌이 노동자들의 현실을 추적하는 것에 있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무허가 주택들이 신속하게 철거되고,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조성돼 부동산 열풍이 일어나는 등 도시 정비 사업이 활발히 일어났던 현실에서, 문인들은 삶의 근거지를 상실하고 변두리로 밀려나 궁핍한 삶을 이어나가는 도시 저소득층의 현실을 다루는 데에 집중했다”라고 말했다.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1973)에서 이들은 급격한 산업화의 영향으로 고향을 잃어 공사판을 매일 전전해야 하는 사람들(‘영달’의 무리)로 표현되기도 하며,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1977)에서는 애써 분양을 받은 땅값과 세금을 감당하지 못해 또다시 거처를 잃고 세입자 신분으로 떠돌아다니는 인물(‘권 씨’)로 묘사되기도 한다.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그 단면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소설은 1970년대 산업화 시기에 도시 재개발로 철거민 신세가 된 ‘난쟁이 일가’의 비극을 다룬다. 강제 철거로 오랜 거처를 잃은 난쟁이 일가는 공장 노동자가 돼 도시의 주변부로 밀려난다. 권영민 명예교수(국어국문학과)는 “난쟁이 일가가 직면한 철거의 위협은 산업화 과정에서 자기 삶의 터전을 일구지 못한 도시 노동자의 비참함과 절망감이 투영된 대표적인 사례”라고 밝혔다. 권 교수는 소설 속에서 두 가지 세계, 즉 “철거민으로 내몰린 노동자들의 삶의 세계와 재개발을 주도하는 거대 자본으로서 기업의 세계가 대립한다”라며 “두 세계는 화해하지 못한 채 가난한 자와 가진 자라는 구조를 재생산하기에 도시 빈민의 경제적 고난을 심화하는 결과를 낳는다”라고 해설했다.

문인들은 도시 빈민을 산업화의 피해자인 동시에 그 과정에서 빚어진 문제에 적극적으로 맞서는 저항 주체로 이해했다. 이양숙 교수(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는 산업화 시대의 소설에서 도시 빈민은 “경제적으로 양극화 국면에 접어들었던 현실을 세밀하게 고발하는 중심 소재”이자 “현실에 대항할 수 있는 주체를 소설의 차원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작가들의 고민이 낳은 결과물”이었다고 풀이했다. 도시 빈민에 대한 관찰을 소설의 서사로 풀어냄으로써 빈곤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집단의 정체성을 규정하려는, ‘대항문학’으로서의 성격이 강했다는 것이다. 류보선 교수는 “많은 문인의 문제의식이 이처럼 고도성장의 신화 주변부에 있는 빈민의 문제를 드러내는 것에 있었다”라고 당대 소설계의 흐름을 정리했다.

 

또 다른 결핍의 가능성, 산업화 시대의 도시 중산층

한국소설이 항상 물질적 결핍의 문제만을 다뤄 온 것은 아니다. 생계의 위협을 느끼지는 않아도 남과 자신을 비교하며 정신적 결핍을 느끼는 사람들도 소설에 자주 모습을 보여 왔다. 1970·80년대는 아파트 구매에 열중하는 등 도시에서 삶의 기반을 확실하게 세우고자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이 등장한 시기기도 했다.

강남과 마포구 등 서울권에 불었던 재개발 붐을 소설의 배경으로 삼은 박완서의 『닮은 방들』(1974)에서 주인공 ‘나’는 마포구의 신식 아파트를 사기 위해 모친의 집에 얹혀살면서 부족한 형편에도 악착같이 돈을 모은다. 그는 기본적인 의식주는 부족함 없이 충족할 수 있어도 먼 미래까지 대비할 정도로 자금이 충분하지는 않은 일반 서민층에 해당한다. 나보령 강사는 “한국 사회에서 이른바 ‘중산층’이 문학적으로 재현되기 시작했던 때가 바로 이 시기”라며 도시 거주자들이 시달렸던 ‘스위트 홈 콤플렉스’에 대해 설명했다. 산업화 시기의 경제 개발 기조 속에 아파트가 안락한 생활과 부의 상징으로 등장함에 따라, 사람들이 아파트 구매에 열을 올리며 중산층의 세계로 편입하기를 욕망했다는 것이다. 나 강사는 “이들은 경제적으로 당장은 곤궁한 처지에 처하진 않았음에도 더욱 부유해지려는 욕구를 충족하지 못해 정신적으로 궁핍한 상태에 내몰린다”라고 부연했다.

 

"아내는 꿈에 그리던 내 집을 장만했는데도 여전히 남의 식구를 둘 수밖에 없는 현실을 슬퍼했다. 하지만 (…) 더욱 분명한 것은, 20평 부락에 사는 사람과 100평 부락에 사는 사람과의 차이였다. 그것은 바로 20평의 마음과 100평의 마음의 격차였던 것이다. 시청 뒤로 이사한 그 이후부터 아내에겐 누구하고 현주소에 관한 얘길 나누는 기회마다 언필칭 우리는 은행주택에 살고 있음을 힘주어 말하는 버릇이 생겼다."

- 윤흥길,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중

 

아파트 소유자라는 이미지로 굳어진 안정적인 중산층 세계에 대한 선망은 곧 비슷한 욕망을 가진 타인을 견제하는 마음으로 변주되거나, 자신보다 그 세계로 편입될 가능성이 적어 보이는 타인을 깎아내릴 수단이 되기도 했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에서 ‘나’의 아내는 교사인 ‘나’와 살림을 차린 본인의 상황을 자신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시집을 간 주변 친구들의 삶과 비교하며 열등감과 결핍을 느낀다. ‘나’ 역시 다른 동창들에 비해 연봉도 적고 출세와는 거리가 먼 자신의 사회적·경제적 지위에 박탈감을 느낀다.

하지만 이들은 동시에 100평대 전셋집의 주인으로서 세입자 권 씨네에 둘 이하의 자녀까지만 허용하는 등 ‘가진 자’의 권위를 적극적으로 행사하기도 한다. 권 씨네로부터 세를 주기적으로 받아야만 중산층으로서의 경제 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위기의식을 느끼면서도 가진 게 없는 권 씨네에 자신의 부와 권위를 과시하려 한다. 나보령 강사는 이를 두고 “중산층이라는 범주 자체가 불완전하고 상대적인 개념이었던 만큼, 개인은 끊임없이 주변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그 대열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라며 “문인들은 이런 위기의식을 예리하게 포착해 소설에 담아냈다”라고 설명했다. 중산층 신화를 믿은 ‘화이트칼라’ 도시인들도 결핍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을 소설이 꼬집었다는 것이다.

이때 작가들은 평범한 도시인들을 속물성이 짙고 자기중심적인 ‘소시민’으로 재현하기도 했다. 양귀자의 『원미동 사람들』(1985~1987)에서 새로 들어온 청과물 가게를 끝내 폐업시키기 위해 담합을 서슴지 않았던 ‘경호네’와 ‘김 반장네’처럼, 이들은 약자와 이웃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안위를 챙기기에 바쁜 이기적인 존재로 표상됐다. 이양숙 교수는 “1980년대까지의 소설은 당대 현실을 적나라하게 그리는 리얼리즘 사조를 바탕으로 빈곤한 노동자를 부조리한 현실의 대항 주체로 내세워 사회 비판을 이루려는 경향이 강했다”라며 “속물적인 소시민으로서 도시인을 그려, 빈민 노동자의 대척점에 놓은 것도 이와 같은 리얼리즘 도식의 산물”이라 이야기했다.

1970·1980년대 소설은 산업화 시대를 대표하는 두 구성원으로부터 이후 경제적 양극화와 빈곤 문제가 만성화될 출발점을 읽어냈다는 것이 중론이다. 나보령 강사는 “난쟁이 가족의 사례처럼 무허가 주택 지대가 철거되면서 그곳에서 쫓겨나 도시 빈민으로 전락했던 사람들의 축과 함께 그들에게 입주권을 사서 아파트를 분양받길 간절히 원했던 중산층 꿈나무들의 축도 있었던 것”이라고 당대 사회상을 정리했다. 이양숙 교수는 “도시화가 진행될수록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격차가 커졌다”라며 산업화 이후 두 축 간의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사라진 사람들: 만성화된 자본주의와 좁아진 시야

1990년대에 불평등이 사회에서 ‘상수화’되며 빈곤에 대한 사람들의 관념이 서서히 변화했다. 가정환경과 같이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태생적인 요인을 인식함에 따라 불평등은 점차 극복하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할 대상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개인이 학력이나 어학 점수, 전문 기술 등 비교적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해 자신의 경쟁력을 제고해야 한다는 ‘제한적 노력 담론’이 대두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에 대해 류보선 교수는 “민주화 운동처럼 연대의 계기가 점차 사라지는 가운데 개인 간 경쟁을 사회 발전의 핵심으로 장려하는 자본주의적 사고가 고착화되는 국면”이었다며 그로 인해 “빈곤을 개인이 극복해야 하는 문제로 축소하는 관점이 태동했다”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개인은 노력과 능력이 중시되는 경쟁 체제에서 자신만의 생존 전략을 세워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보존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다. 김홍중 교수(사회학과)는 「서바이벌, 생존주의, 그리고 청년 세대: 마음의 사회학적 관점에서」를 통해 이 시기부터 오늘날까지의 청년층을 “생존주의 세대”라 명명하며 청년들은 “생존에 대한 불안이라는 기조 감정과 서바이벌을 향한 과열된 욕망, 그리고 경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자신 존재의 가능성들을 전략적으로 계발하려는 심리”에 매몰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큰 꿈 없는 세대’를 만드는 요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한국이 선진국이 되어가면서 사회체제가 안정되고 1970년대나 80년대처럼 파이가 많이 남지 않았다. 각 조직의 관료화가 완료돼 조직 내 세대교체가 쉽지 않아졌고, 새로운 일자리는 대개 서비스업에서 만들어지는 단순 노동거리다. 대단치도 않은 눈앞의 과실을 따기 위해 온 힘을 쏟다 보면 그만큼 생각의 폭이나 그릇이 작아지게 된다. (…) 게다가 과거 세대들은 민주주의라든가 자본주의 정착, 근대 체제로의 편입과 같은 중요한 역사적 과업도 이미 달성했다. (…) 그래서 이 세대는 큰 꿈을 가질 수 없게 됐다."

- 장강명, 『표백』(2011) 중

 

장강명의 장편소설 『표백』은 이런 문제의식을 함양하고 있는 대표적인 소설이다. 서울권 대학에 재학 중인 ‘나’와 친구들은 고도성장 시대 이후 90년대에 태어나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청년들이다. 주인공들은 성장의 상승곡선을 그렸던 시대가 끝난 뒤 도래한 포화 상태의 시대, 즉 새로운 기회가 줄어든 한국 사회에서, 꿈에 대한 희망을 찾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삶을 흘려보내는 존재로 묘사된다. 주인공은 이런 세상을, 청년들이 무언가를 더 보탤 필요가 없는 “완벽한 흰색의 세상”이라 표현하며 청년 세대가 겪는 좌절감을 말한다.

학계는 청년층을 포함해 도시인들의 목표가 냉혹한 경쟁 시스템 안에서 살아남는 것에 있다고 짚는다. 조문영 교수(연세대 문화인류학과)는 “현대의 청년 세대는 사회와 과잉 접속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라며 “현대사회의 스펙 쌓기 경쟁이 청년들로 하여금 자기자신을 끊임없이 상품화하며 제 한 몸 건사하기 급급한 상태로 내몲으로써, 쪽방촌 주민이나 홈리스처럼 빈곤선 이하의 생활수준에 놓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질 여유를 앗아간다”라고 주장했다. 오창은 교수(중앙대 국어국문학과)는 “현대소설에 재현된 대도시는 타인의 시선이 배제된 자신만의 공간을 정립하려는 개인이 모인 장소”라며 “정신적인 박탈감이 현대 빈곤의 상징으로 여겨짐에 따라 절대적 빈곤을 겪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도시라는 공간에 은폐되기 쉬웠다”라고 주장했다.

 

파편화된 세계에서 이해와 공감의 씨앗을 찾다

진퇴양난의 현실이다. 자기 자신을 인적 자본으로 상품화하며 스펙 경쟁에 뛰어드는 도시인을 어려운 이웃에 대한 배려심이 부족한 이기적인 존재라 단언할 수도, 궁핍한 생활을 꾸려나가는 빈민을 본인의 나태함 때문에 가난을 극복하지 못한 존재라 단언할 수도 없다. 이에 개인은 빈곤 문제의 핵심을 짚지 못한 채 책임 소재를 다른 집단에 떠넘기는 ‘탓하기’를 반복해 왔다. 조문영 교수는 “이런 상황은 결국 구성원 간의 이해와 공감을 차단하는 동시에, 노력의 부족 혹은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났다는 운을 이유로 서로가 서로를 비방하는 분위기를 조성한다”라고 역설했다.

그럼에도 현대소설 연구자들은 문단이 여전히 연대와 소통을 향한 희망을 놓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시야가 좁아지며 단절이 일상화된 상황에서도 각자가 직면한 고통의 무게를 이해하고 보듬으려는 시도들이 소설에서 포착된다는 것이다. 김애란의 「큐티클」(2009)에서 대도시의 평범한 직장인인 ‘나’는 자신의 삶이 객관적으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주변 시선을 의식해 보다 과시적인 소비에 집착한다. 하지만 실상은 만 오천 원이라는 네일 서비스의 가격을 듣고, 생각보다 비싼 값에 놀란 마음을 애써 드러내지 않으려 직원 앞에서 연기하는, 서글픈 삶이다.

 

"서울 변두리에 자리한 그저 그런 원룸이었지만 그간 세를 산 집 중 가장 넓고 쾌적한 데였다. (…) 정착의 느낌을 재생반복하기 위해 자꾸 이것저것을 사들이고 집을 꾸미기 시작했다. (…) 그러니까 딱 한 뼘만…… 9센티만큼이라도 삶의 질이 향상되길 바랐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 많은 물건 중 내게 ‘딱 맞는 한 뼘’은 없었다는 거다. 모든 건 늘 반 뼘 모자라거나 한 뼘 초과됐다. 본디 이 세계의 가격은 욕망의 크기와 딱 맞게 매겨지지 않았다는 듯."

- 김애란, 「큐티클」 중

 

「큐티클」의 주인공으로 표상된 도시 소시민들의 무력감과 우울감은 김애란의 또다른 단편 「서른」(2011)의 주인공이 아르바이트생으로 근무하는 학원의 아이들을 향해 던지는 독백에서 합쳐진다.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제각각의 꿈을 안고 살아가는 아이들도 결국 결핍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저 그런 어른’으로 자라리라는 안타까움이다. 작가는 이처럼 보일 듯 말 듯, 적나라하게 드러나진 않는 현대인의 결핍을 이야기하며 각자의 고단함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섬세하게 관찰하고 이들에게 공감의 시선을 보낸다. 이양숙 교수는 “90년대 이후 작가들은 도시인을 ‘속물성’이라는 특성으로만 파악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그들에 대한 연민을 보여주기도 하고, 극심해지는 빈부격차로 인한 고통을 공유하는 사람으로서 공감과 무력감을 표현하기도 했다”라고 설명했다. 

도시 빈민에 대한 시선도 마찬가지다. 장은진의 『외진 곳』(2018)에서 ‘나’와 여동생은 다단계 사기를 당해 서울 변두리의 다세대 가옥으로 이사를 가, 주변 이웃들과 일절 교류하지 않은 채 일상을 보낸다. 주인공 일행뿐 아니라 같은 건물에 사는 다른 주민들 역시 얼굴을 비추지 않으며 스스로의 존재를 감추려 한다. 하지만 작가는 이렇듯 도시의 외진 곳으로 밀려나는 도시 빈민의 모습을 비관적으로만 그리지는 않는다. 소설은 창문 사이로 새어 나오는 불빛들 사이에서 묘한 반가움과 위로를 느끼는 주인공의 모습을 결말로 제시함으로써 타자와의 소통에 힘입어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갈 희망의 끈이 끊어지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나보령 강사는 “저마다의 방에 비치는 제각각의 불빛들은 빈민들이 느끼는 보편적인 삶의 무게와 외로움에서 발하는 불빛이기도 하다”라며 “결론적으로 불빛은 폭넓은 공감과 연대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장치가 된다”라고 설명했다.

더 빈곤한 자와 덜 빈곤한 자 간의 첨예한 대립 구도를 벗어나 연대를 이루기 위해 일각에서는 빈곤을 이분화하는 사고방식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정문순 문학평론가는 “물질의 극단적 결핍이라는 고전적인 정의나, 모두가 힘들고 가난하다는 극단적으로 상대화된 정의로는 오늘날의 빈곤 문제를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라며 빈곤에 대한 개인의 관점·경험에 더욱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문순 평론가는 이것이 “현대소설이 빈곤이라는 사회 문제를 다룰 때 안고 가야 할 문제의식”이라며 소설의 발전 방향을 제시했다.

 

소외된 아픔과 이야기를 들춰내는 것. 서사를 핵심으로 하는 소설이 사회 문제를 다룰 때 발휘하는 힘이다. 소설은 이처럼 현실에서 드러나는 사회 문제에 면밀하게 반응하며, 그에 대한 고민의 결과를 작품에 녹여 왔다. 빈곤 문제를 다루는 과정 역시 그랬다. 객관적인 지표로는 파악하기 힘든, 결핍의 개별화된 경험을 소설은 다각적으로 그려냈다. 권영민 교수는 “현대소설의 의의는 사람들의 ‘지금 여기’를 표현하는 것에 있다”라며소설이 인간의 삶을 담아낼 수 있는 솔직한 표현 방식임을 역설했다. 앞으로도 소설이, 나아가 문학이 지금의 사회를 인간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시선을 견지하기를 기대해 본다.

 

삽화: 김채영 기자 kcygaga@snu.ac.kr

김지온 기자 kion@snu.ac.kr

유지원 기자 uz10913@snu.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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