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평전』을 처음 읽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삶을 떠올리면 울컥하는 마음을 억누를 수 없다. 기사를 쓰는 내내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의 삶 중 어떤 부분이 네게 그리도 깊이 닿았던 것인지. 나는 그처럼 처절한 환경에서 태어나지도, 어떤 가치를 위해 치열하게 투쟁해 본 경험도 없다. 분신한 그와 같은 나이인 나는 겨우 당장의 휴식과 미래의 안정에 목매며 모든 것을 계산적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부끄러움을 뒤로 하고 일단 공부해서 ‘지식인’이 돼야 나중에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고 합리화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무거운 죄책감과 미래의 나에 대한 의심이 잔재했다. 기존 지식인들의 행태를 봤을 때 내가 그들과 다르다고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지. 자신에게 냉정해질수록 근거는 더욱 희미해졌다.

그래서 이번 기획의 시작은 내게 일종의 ‘속죄’와도 같았다. 우리 사회의 취약계층에 집중하며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해소해 보려 했다. 그러나 취재를 하면서 ‘나’라는 거대한 장벽을 마주했다. 취약계층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의 삶을 엿보는 동안 나는 그들과 제대로 섞이지 못하고 있었다. 살아온 삶의 궤적에서 비롯된 생각과 태도의 차이는 단순히 내가 그들에게 감정적으로 이입하려는 시도로 메꿔지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타인일 뿐인 내가 그들의 삶에 공감하려는 것이 위선일 수 있음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이토록 나와 타인의 경계를 느끼는 것이 자본주의로 인해 파편화된 개인의 문제를 드러낸다고 생각했다. “너인 나, 나인 너”를 외친 전태일처럼 우리 모두는 결국 노동자임을 자각하고 연대해야지, 개인주의를 극복하고 공동체 사회로 나아가야지 생각했다. 그러나 전태일 정신의 현대적 계승을 고민하며 이런 생각이 얼마나 보편적인 설득력을 가지는지 자문했다.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이분법이 어떤 이들에게는 폭력이 아닐지, 노동자 외의 다른 정체성도 지닌 이들에게 전태일을 내세워 단결을 강요하는 것은 아닐지 되돌아봤다. 또한 과열된 경쟁 속 이미 소진된 개인의 활력 앞에, 나와 타인의 경계를 허문다는 말이 얼마나 공허하게 들릴지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고민 끝에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것은 노동자라는 정체성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주체성에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자유로운 개인의 공동체’를 이상으로 제시하는 마르크스 경제학과 ‘개인의 자유로운 역량 발휘’를 주장하는 시장주의는 결국 인간의 주체적 자유라는 목표에서 만나지 않을까 감히 생각했다. 누군가는 이 또한 안온한 환경에서 자란 미래 지식인의 관념적 허상에 불과하다고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전태일의 삶에서 가장 감동했던 부분은 그가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투쟁했던 것보다 한 명의 인간으로서 주체적 가치를 위해 몸을 내던졌다는 점이다. 결국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전태일 정신의 중핵은 주체성의 각성이라는 생각으로 기사를 마무리했다.

그러나 이 주체성은 무제한적인 탐욕 추구와 이기주의를 의미하지 않는다. 대신 개인에게 더욱 섬세하고 깊이 있는 반성적 사고를 요구한다. 내 욕심을 채우고자 하는 행동이 과연 진정으로 나의 주체성을 발현하는 것이 맞는지 끊임없이 자성해야 한다. 이는 미래에 위선자가 될 것이라는 두려움에 잠식돼 있던 내게도 길을 열어줬다. 타인과 교류하려는 나의 주체적 가치를, 내 세계에서 최선을 다해 실현한다면 말로만 남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위선자가 될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나를 포함해 이번 기사를 읽는 이들이 주체성을 각성하고 각자의 가치를 망설임 없이 실현하는, 전태일과 같은 뜨거운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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