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눈치 빠른 사람은 눈치 없는 척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눈치 빠른 사람은 눈치 없는 척하는 사람을 알아도 모르는 척한다. 눈치채지 못한 척, 잘 모르는 척하는 게 세상을 완만하게 살아가는 방법으로 여겨진다. 나도 상당 부분 이에 동의하며 살아왔다. ‘잘 모르면 가만히 있어라’라는 말처럼 잘 알아도 가만히 있어 왔다. 모르는 척 가만히 있기는 정말 쉽다. 말 그대로 가만히 있으면 된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고, 어떤 말을 듣든 어떤 상황을 보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인 양 있으면 별문제 없이 살아갈 수 있다. 나는 이렇게 주체적으로 ‘행동하지 않을 것’을 선택해 왔고 갈등을 직면하고 싶지 않으면 회피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나처럼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 추측하며 질문을 하나 던지고 싶다. 가만히 있겠다는 것이 본인의 의지였는가? 나는 나의 의지로 모르는 척했던 것인가?

지난 학기 교양강의의 과제로 서울대 인권센터의 온라인 인권/성평등 교육을 이수했다. 교육 내용 중 인간관계에서의 진짜 권력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었다. 예를 들어 공동체 의견을 정할 때 자신의 의견을 강행하거나 혹은 상대에게 조언할 때 자신의 견해를 서슴지 않고 표현하는 등, 사소한 문제일수록 일상에 숨겨져 있던 관계 속 권력이 드러난다. 인권 교육에서는 이렇게 자신이 생각한 말을 참지 않고 털어 내는 것이 진짜 권력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이를 보며 앞에서 말했던 눈치채지 못한 척, 다 알지만 일부러 가만히 있는 척했던 행동들이 과연 나에 의한 결정이었는지 생각해 보게 됐다. 나의 결정이 주류 의견을 반박할 힘이 없어서인지, 누구에게 눈치를 받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를 다시 돌아보기로 했다. 

최근에 봤던 한 유튜브 동영상에는 우연히 등장한 일반인 여성에게 “예쁘다”라는 댓글이 달려 있었고 대댓글로 “얼평(얼굴 평가) 하지 마라”라는 내용이 남겨져 있었다. 그 아래로는 오프라인 상황이었다면 고성이 오갔을 험악한 표현들이 줄을 이었다. 나는 조용히 대댓글에 ‘좋아요’를 누를 뿐이었다. 누군지 모를 사람들이 내 의견에 욕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일상 속에서도 이런 상황이 종종 있다. 사회 일반 의견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 자체가 주는 어색한 침묵을 피하고자 입을 다무는 상황 말이다. 은근슬쩍 말을 흘렸다가도 주위 눈치를 보며 말의 수위를 조절하고 수습하는 게 일상이다. 권력을 가지지 못한 의견은 눈치 볼 수밖에 없고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다. 아무 부연 설명 없이,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향하는 “예쁘다”의 함의를 알아도 대댓글처럼 이야기하지 못하는 얄팍한 용기와 눈치는 오히려 나의 무기력함을 인지하게 할 뿐이다. 대댓글의 ‘좋아요’ 수 또한 적지 않음에도 말이다. 서슴지 않고 말하는 권력은 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의견에 가해지는 경멸을 경험한 자들은 침묵을 택하게 되고 침묵은 또 강요된 침묵을 부르고 있다.

물론 모든 인간관계가 이런 권위적인 침묵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가만히 있기를 택한 이상 어떤 상황이 나를 가만히 있게 만드는지를 명확히 할 필요는 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한 침묵과 일상에 내재된 권력관계 속에서 용기 없이는 말할 수 없었던 이의 침묵은 명확히 구분된다. 후자의 침묵을 개인이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자신이 행한 ‘가만히 있음’이 의미하는 바를 되돌아보길 부탁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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