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2학년 때 친구와 학교 수업을 마치고 하교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문 밖으로 나서서 하굣길을 열댓 걸음 채 걷기도 전에 어느 중년의 아저씨가 내 친구와 나를 멈춰 세우는 것이 아닌가. 우리를 멈춰 세운 아저씨는 대뜸 천국과 지옥, 그리고 구원에 대한 장광설에 돌입했다.

이윽고 주변을 둘러보니 학교 정문에는 우리와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는 학우들이 도처에 있었다. 인근 교회에서 우리 중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으로 전도하기로 날을 잡은 듯했다. 하굣길 길목마다 아저씨와 아주머니분들이 대거 기다리고 있다가 지나가는 학생들을 붙잡고 ‘좋은 말씀’을 전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날이 유독 내 기억에 강하게 남은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당시 그 아저씨와 내가 나눈 대화 때문이었다. 미리 밝혀두자면 나와 내 친구는 둘 다 이미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교 신자다. 조금 더 세밀하게 말하자면 그리스도교의 여러 갈래 중 천주교를 믿는다. 아저씨가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며 열변을 토하자 나는 아저씨의 수고도 덜 겸, 빨리 집으로 돌아갈 겸 우리 둘 다 예수를 믿는다고 솔직히 말했다. 문제는 곧 그 아저씨가 우리더러 어느 교회에 가느냐고 물으면서 발생했다. 우리가 성당에 다닌다고 답하자 아저씨는 낯빛을 바꾸며 천주교를 믿으면 지옥에 간다고 부리나케 목청을 높이는 것이었다.

이쯤에서 내 친구는 꽤 현명하게도 자리를 서둘러 떴다. 그러나 신학과 종교에 다소 관심이 있었던 나는 조금 언짢으면서도 아저씨가 그리 발언하는 근거가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해 아저씨에게 내가 지옥에 가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차근차근 여쭤봤다. 안타깝게도 그 아저씨는 넘쳐나는 종교적 열성에 비해 그의 굳건한 신념을 명료하게 전달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물어볼수록 빈약해지는 아저씨의 답변에 나는 논거를 되묻기도 하고 나름대로 반론도 제시해 보면서 ‘길거리 즉석 토론’에 최대한 정중하게 임했다.

대략 15분, 20분 정도 흘렀을까. 끊임없이 반론과 질문이 제기되자 아저씨도 내심 지친 눈치였다. 나 또한 이 대화로부터 얻을 수 있는 실익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이만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하교하고자 했다. 그런데 내가 매우 공손하게 인사드리고 발길을 돌리자 아저씨가 그만 진절머리가 났는지 집으로 가는 내 뒤통수에 ‘신앙심 없는 X’이라고 욕설을 내뱉는 것이 아닌가.

그날 그 아저씨는 자신의 아들뻘이면서 같은 예수를 믿는 중학생에게 왜 욕설을 내뱉었을까. 그의 주장과 달리 나는 나를 신앙심 없는 사람이라고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예수의 삶으로부터 사랑, 포용, 배려, 희생, 헌신, 자비와 용서가 무엇인지 배우면서 그의 가르침을 미진하게나마 좇고자 하는 의지는 나를 포함한 수많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삶의 선명한 이정표다.

그러나 최근 우리 사회에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인식 전반이 악화된 듯해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교회의 사명은 본래 이웃과 약자를 사랑하고 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것임에도 오히려 우리 사회에서 그리스도교, 즉 기독교에 대한 인식은 마냥 좋다고 자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특히 올해는 교회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집단감염과 극우 개신교계의 방역 훼방이 이어져 막대한 사회적 피해가 발생했다. 최근 개신교 신자가 저지른 남양주 사찰 방화 사건까지 고려한다면 2020년은 어느 때보다도 한국 교회의 자성이 필요한 한 해가 아니었는지 생각하게 된다.

같은 맥락으로 최근 「서울대학교 인권헌장」을 둘러싼 논쟁을 지켜보면서 적잖이 심란할 수밖에 없었다. 인권헌장의 조문들은 말 그대로 인권을 보호하고자 하는 취지로 작성됐으며, 그 어디에도 반(反)기독교적 정신을 조장하는 내용은 없다. 오히려 대학 구성원 누구도 부당히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자명한 이치를 담고 있을 뿐이니 그리스도교인으로서 강하게 지지할 만하다. 그런데도 보수 기독교 성향의 단체가 나서서 학내 성소수자들을 따로 구별 짓고 대학 내 차별과 배제를 부추기고자 했다는 사실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배타와 독선. 이 두 단어는 그리스도교의 참된 정신과는 끔찍하게 이질적인 단어임에도 오늘날 교회를 언급하면 이 두 단어가 어렵지 않게 떠오른다는 점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그리스도교인 대부분은 사랑과 포용을 실천하며 신실하게 살아간다는 점에서 위안을 얻지만, 그런데도 마음 한편이 울적해지는 것은 왜일까. 오늘도 예수는 누군가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해 십자가를 짊어지셨다는 점을 떠올리며 그저 자성해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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