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짝 열린 창문 사이로, 아스라이 들려오는 빗소리에 잠이 깬다. 선선한 늦가을 아침이다. 정신을 깨우려 내린 커피를 들고, 베란다 벽에 기대 내려다본 창밖 풍경에는 출근하는 사람들이 한창이다. 19층에서 본 사람들의 형상은 일개미만치 조그맣다. 조그마한 이들은, 저마다 가방 하나씩을 비끄러매고 바쁘게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더러는 지각할 시간인지 뛰기 시작한다. 산다는 것이 무엇이길래, 어디로 나아가야 하길래 비 오는 아침에도 서로를 채근해 일터로 불러내는 걸까? 의문은 이윽고 스스로에게까지 미친다. 전공으로 가득 찬 21학점에 아르바이트에 학보사 기자 활동까지, 비대면 지침이 유연하게 적용되는 대학생인지라 제 굴속에 들어앉은 것으로 충분해 빗길을 뚫고 지나갈 필요만 없을 뿐, 문간을 나서기만 한다면, 역시 저 틈에 자연스레 섞여 들어갈 수 있을 듯하다.

몽롱하게 펼쳐지는 감상에서 빠져나오고자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켠 눈에 들어온 건 “수도권 7만 호 임대주택 공급”이라는 헤드라인이다. 중산층도 만족할 수 있는 양질의 공공임대주택을 공급함으로써 시장의 유동성을 잡겠다는 홍남기 부총리의 말은, 3년 전 들었던 경제학원론 수업에서의 한 구절을 확 잡아 기억 저편에서 끌어낸다. 정부의 규제는 결코 시장을 이겨낼 수 없다는 말이었다. 경제학의 기본 원칙 중 하나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배운 바와 눈앞의 정책이 엇갈리는 듯하니 아리송하다. 발언을 보도하는 기자들 역시 같은 생각을 했는지, 부총리의 발언을 인용한 기사의 내용은 정책의 허점을 짚어내는 문장으로 한가득이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불현듯 아까의 “왜 이렇게 열심일까?”라는 질문이 다시 떠오른다. 다들 원하는 것, 지켜야 하는 것이 있기에 이다지도 열심인 게 아닐까 하는 답변을 나름의 궁리로 써 내려 본다. 그러나 불어나기 시작한 궁금증은, 뒷배가 없는 얄팍한 답변으로는 쉬이 만족하진 않을 모양새다.

이번에는 그동안 들었던 수업들과 몇 안 되는 나름의 경험을 엮어본다. 이것저것 끌어보다 떠오르는 건 학기 초 유현준 교수님과의 인터뷰다. 집값은 대체 왜 계속 오르는 거냐고 장난스레 던진 우문에, 교수님은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을 떠올려 보라는 말씀으로 답해 주셨었다. 뭔가를 원하고, 더 나은 삶을 누리고자 하는 건 생명체로서 갖는 당연한 본능이다. 열대우림의 식물들마저도 한 뼘의 태양 빛을 더 쬐고자 치열한 사투를 벌인다. 하물며 인간인 우리는 어떠한가. 대부분은 욕구가 충족될 미래에 대한 희망, 현재보다는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오늘처럼 비 오는 아침에도 무거운 몸을 일으켜 출근길의 대열에 올라선다. 당연하게도, 피로한 현대의 일상에서 우리를 일으켜 책상 앞에 앉혀주는 이 희망에는, 내 집 마련에 대한 염원, 그리고 되도록 좋은 집에 살고자 하는 소망이 들어있다. 한강 변, 서울숲에 멋들어지게 늘어선 고급 아파트들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쳐 나가는 것은 비단 글쓴이만은 아닐 테니 말이다. 

그렇기에 공공임대주택 공급은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단이 되기에는 더더욱 부족해 보인다. 좋은 집에 살고자 하는 요구에 호응하기는커녕, 오히려 누르는 것에 가까운 까닭이다. “줬다 뺏는 놈이 제일 나쁘다”라는 경구가 떠오른다. 줬다 뺏는 행동이 나쁜 이유는, 가진 것을 빼앗겼을 때 남는 빈자리의 공허함 때문이다. “잃어버리고 나서야 소중함을 알게 된다”라는 말도 이와 같은 맥락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설령 작은 집이었더라도 자신 소유의 집을 가져본 경험이 있는 중산층들이, 자가를 잃은 채 공공임대주택으로 쓸려나가게 된다면, 여전히 무거운 가방을 짊어지고 아침부터 일터로 향할 수 있을까? 

욕구를 충족할 수 없다는 절망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에 대해서는 역사가 증빙해 준다. 불과 한 세기 전에 지구의 절반을 휩쓸었던 공동소유에 대한 환상이 어떤 결과를 빚어냈는지를 되새겨본다면 공공임대주택의 결말도 어림해 볼 수 있다. 이상이라는 건 더없이 듣기 좋은 말이다. 그러나 욕망을 충족시키는 존재라는 인간의 본성을 간과한 이상은, 우리가 피곤한 몸을 이끌고도 열심히 살 수 있게 해주는 동력을 끊어 내는 결과로 이어지는 함정일지도 모른다. 정책을 결정하기에 앞서 위정자들 자신도 다시 한번 자신은 어디에 살고 싶은지, 자신은 어디에 살고 있는지 돌아본다면, 불현듯 이상과 현실의 적당한 타협점을 떠올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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