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윤정 선임연구원(사회발전연구소)
주윤정 선임연구원(사회발전연구소)

인권은 보편 원칙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어떤 피해가 심각하게 발생하고 있을 때, 인간의 비가시화된 고통과 피해를 예방하고 보호해 나가는 구체적인 과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근대 사회 인권의 역사는 보편적 인권 규범의 확장뿐 아니라, 구체적인 피해와 고통에 대한 대응으로부터 시작했다. 세계인권선언 역시 제2차 세계대전 때 발생한 인명학살의 참극을 반복하지 않으려는 세계인의 노력 속에서 태동했다.

한 사회에서 규범과 헌장이 필요한 것은 조직과 구성원의 수가 확대되고 다양화되면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합리화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페이샤오퉁이라는 중국의 사회학자는 예치와 법치의 차이에 대해, 동질적이고 아는 집단들이 함께 거주하는 향촌 공동체에서는 인(仁)과 예(禮)라는 원리에 의거해 사람들 간의 조정으로 사회 문제 해결이 가능했지만, 이질적이고 낯선 사람들이 함께 거주하는 도시 사회에는 법치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서울대도 현재 여학생, 장애학생, 다양한 국적의 유학생 및 교직원 등의 증가로 구성원이 다양해지고 있다. 그래서 젠더, 신체적 정상성, 인종 등 기존의 동질성을 바탕으로 대학이 운영되던 방식에서 벗어나 다양하고 이질적인 구성원 간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규범이 확립돼야 할 필요가 증대되고 있다. 

이에 대한 준비가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학내에서는 수많은 성폭력 사건이 가시화됐으며, 인종 차별, 소수자 차별 등의 문제도 계속되고 있다. 학내 구성원이 다양해지는 만큼, 학내 구성원 간의 규범이 명문화돼야 문제를 예방하고 해결할 수 있다. 현대 사회의 복잡성과 그에 따른 문제들은 단지 인간의 선한 본성에 대한 신뢰로만 해결될 수 없기에 법의 통치가 확산됐다. 21세기 한국의 대학은 향촌 공동체 수준의 사회 관계를 넘어섰기에, 법, 즉 명문화된 규범에 의해 사회 관계를 규정해야 하는 사회 조직 단계로 진입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근대 인권의 역사를 살펴보면, 규범의 확립을 통해 구성원들의 평등과 참여가 보장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근대법의 규범과 제도가 인간의 실제적인 존재 방식과 어긋나 있던 괴리와 간극을 줄여나간 것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것이 호주제 폐지다. 부계혈통의 가족관계만을 절대적 가족관계로 규정한 일본제국의 근대 민법 규범은 한국 사회의 실질적인 가족의 존재 방식과는 괴리가 있었다. 조선 시대에는 여성이 호주를 하는 경우도 있었고, 부계혈통만이 아니라 부모 양측의 혈통을 인정하는 가족관계, 남녀균분상속제가 공히 존재했지만, 식민지 민법의 규범 속에서 이런 다양한 가족 형태는 부정당했고, ‘처’는 법적인 측면에서 금치산자가 되기까지 했다. 호주제 폐지에 이르는 지난한 세월 동안, 제도를 고치고 고쳐 다양한 가족의 존재 방식과 여성의 법적 지위가 비로소 인정됐다. 

마찬가지로 성소수자들은 실제 시민으로서 살아가고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가족관계 구성 등 시민권의 영역에서 소외되고 차별받고 있다. 서울대 방문연구원으로 와 있던 토드 헨리 교수(UCSD 역사학과)는 동성 파트너와 가족생활동 입주를 원했지만, 행정당국에서는 혼인 신고서를 요구하며 “외국에서 동성 결혼을 하신 분들이 혼인 서류를 내도 논의는 더 해봐야 할 것 같다”라는 답변을 받았다고 한다. 해외에서는 가족 여부를 법적 등록 이외에도, 실질적으로 생활을 같이 하는지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확인한다. 다양한 가족 존재 방식의 사람들이 서울대의 구성원이 되고 있지만, 이런 존재 방식을 인정하는 제도는 부재하다. 최근 로마 가톨릭의 프란치스코 교황이 성소수자들의 시민결합을 인정한 것은 인간의 실질적 존재 방식을 사회법 체계가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맥락으로, 종교법과 사회법의 차이를 언급한 것이다. 

인권이라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존엄과 다양한 존재 방식을 존중하기 위한 규범이자 최소한의 약속이다. 다양한 구성원이 존재하는 대학사회에서 우리는 새로이 규범을 만들어야 한다. 작금의 대학이 차별과 배제, 그리고 폭력에서 진정으로 안전한 곳인지 묻고 싶다. 혐오 표현, 장애인 차별, 성소수자 차별, 인종 차별, 위계 폭력, 성희롱·성폭력 등이 학내 구성원들에 의해 지금도 발생하고 있으며, 이는 대학이 진리의 전당으로 역할하기 위해 시급히 해결돼야 하는 문제들이다. 인권헌장은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인해 피해를 받지 않고 평등한 관계 속에서 자신들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이자 21세기 대학의 책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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