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썼던 독후감을 기억한다. 초등학교 1학년, 독후감 대회에 나가 보자는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좌식 책상 앞에 앉았다. 황선미 작가의 「마당을 나온 암탉」을 읽고 200자 원고지에 글자를 끼적이는데 당최 무얼 써야 할지도 모르겠고 띄어쓰기는 또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그 일은 8살이 감내하기엔 지나친 고통이었다. 나는 울면서 ‘집필’을 거부했으나 꾸중만 돌아왔을 뿐이다. 당연히 상은 받지 못했다.

글쓰기 하면 떠오르는 알싸한 기억이 하나 더 있다.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 신문 기자가 되겠다는 꿈에 부풀어 있던 나를 한 선생님이 교무실로 호출했다. 나는 당시 그분이 담당했던 교내 신문 동아리의 부원이었는데 선생님이 내게 건넸던 ‘충고’가 그랬다. 너는 공부도 잘 하는 애가 왜 기자를 하려고 하니, 차라리 문과 말고 이과를 선택해서 의대를 (이하 생략), 그리고 네가 그렇게 글을 잘 쓰는 것도 아니잖아. 이제는 기억도 잘 나지 않는 허튼소리 중 그 한 마디만은 여전히 선명하게 떠오른다. 버스에 앉아 훌쩍거리며 소매로 눈물을 훔치던 하굣길이 있었다.

그날 내가 그토록 서러웠던 이유는, 나도 내 글재주가 대단치 않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글쓰기란 원래도 칭찬하는 이 없이 혼자 쓰고 좋아하다 좌절하는 북 치고 장구 치기의 역사였다. 그런데 네 글은 별로라고 타인의 입으로 단단히 쐐기가 박히자 그때부터 내가 글을 쓰는 일이 몹시 우습게 느껴졌다. 지금 생각하면 분통을 터뜨릴 일이지만 진학 방향도 틀어버렸다. 글쓰기가 싫다는 친구들의 아우성 속에서 나는 애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맞아, 나도 글 쓰는 거 너무 싫어.

글쓰기만큼이나 자신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일도 드물 테다. 글을 쓸 때마다 나를 까뒤집어 보잘것없는 소양과 속내를 들키는 것이 두려웠다. 그런데 되짚어 보면, 그 눈물 젖은 독후감 이후로 글쓰기를 완전히 멈춘 적은 한 번도 없다. 머뭇대면서도 일기장에든 블로그에든 미숙한 글이나마 써 내려갔다. 잘 맞지 않는 전공에서 도망쳐 나와 하는 일이라는 게 『대학신문』에서 매주 기사 쓰기였다. 작년 여름 준비했던 특집 기사 '젊은 서울대생의 우울'을 발행했을 때 받았던 피드백들을 기억한다. 녹아 없어질 때까지 곱씹었던 소중한 감상들. 그때 내 글이 누군가에게 닿는다는 감각을 알았다. 글이 여과 없이 나를 투영하는 만큼 나는 그것으로 독자와 소통할 수 있었다. 지금 읽으면 투박하기 그지없는 기사가 여전히 소중한 이유다.

올해 초에는 블로그를 새로 만들었다. 거기에 그간 썼던 글을 옮기다가 깨달았다. 누가 좋아하지도 않는 일을 이렇게 오랫동안 붙들고 있어? 글쓰기가 싫은데 왜 정성껏 탈고까지 하면서 내가 본 영화 이야기를 쓰고 있는 거야? 인정하고 보니 간단하기 짝이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글쓰기는 즐거웠다. 거기에 잘 쓰고 못 쓰는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이제는 선생님의 말을 떠올려도 예전처럼 마음이 따끔거리지 않는다. 온갖 콘텐츠들이 가을철 길가의 낙엽보다 더 많이 발길에 차이는 시대에, 신문사에서는 매일같이 아무도 글을 읽지 않는다고 절규하면서도 나는 또 글을 쓰고 싶다. 비단 글쓰기뿐만이 아니다. 부끄럽고 민망해서 외면해 왔던 나의 숱한 애정과 바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니 용기를 끌어모아 솔직하게 대답해 본다.

 

A. 네. 좋아합니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