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전,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이 몸을 통해 세상에 절규했던 날이다. ̒전태일 50주기: 우리 사회의 사각지대를 조명하다̓ 기사를 읽고 2014년 가을 옛 구로공단 여공들의 역사를 찾아 헤맸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때마침 ‘구로공단 50주년’ 기념행사(1964년 9월 14일으로부터)가 한창이었다. 실제 구로공단 섬유공장에서 일했던 여공분들은 “공순이에서 비정규직으로”라는 구호가 적힌 팻말을 들고 행사장에서 시위를 진행했다. 정말 바뀐 것은 명칭뿐이고 저임금에 고강도 노동을 해야만 했던 여성들의 삶은 50년이 지난 후에도 뚜렷이 개선되지 않은 것인가 끝없는 의문이 들었다. 이 고민은 최초의 콜센터 노동조합의 결성에 대한 대학원 시절 연구에서부터 최근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사태 전후로 새로이 결성된 콜센터 노동조합들의 활동에 대한 연구에 이르기까지 지속된 질문이다. 전태일 정신의 참된 계승을 ‘스스로의 가치를 자발적 의지로 실천’하는 주체적 삶의 자세로 마친 이번 기사를 읽고 다시금 이 질문 앞에 마주해 보았다. 필자가 목격했던 콜센터 여성 상담사들의 삶은 과연 주체적이었을까? 스스로를 노동자라고 의식하는 것이, 노동조합에 가입해 함께 저항하는 것이, 혹은 그 어떤 것에도 포함되기를 거부하고 우수상담사가 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 그 어떤 것이 더욱 ‘주체적인’ 삶이라 말할 수 있을까? 지금 확실히 답할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선택 앞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노동조합 운동이라는 것을 처음 해보는 콜센터 노동조합의 지부장, 지회장, 분회장 분들을 만나왔다. 요구 사항이 적힌 빨간색 조끼(몸자보)를 걸치고 팔을 휘저으며 성명서를 목청껏 울부짖는 것을 하게 될지 전혀 몰랐던 분들이었다. 그저 아파서 출근을 할 수 없는데도 나와서 ‘출근도장’(컴퓨터 로그인)이라도 찍으라고, 심한 경우 병원을 다녀와서 바로 출근하라고 강요하는 콜센터 관리자들의 비인간적인 횡포 앞에 ‘주체적’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동조합을 설립한 분들이었다. 막상 조합을 만든 후에도 원청기업의 무시와 하청기업의 횡포 앞에 그리고 다양한 조합원들의 요구 사항 앞에 두렵고 막막하기만 했던 경험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반대로 업체의 횡포에 공감했지만 관리자의 눈 밖에 나서 평점이 낮아지고 월급이 삭감당하는 것이 두려운 비조합원 일반상담사들도 분명 존재했다. 그런데, 이들 모두의 바람은 근본적으로 동일했다. 열심히 일하면 생계를 걱정하지 않고 직장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 것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 실직 상태로 내몰릴지 모르는 위태로운 계약 상태였다. 이 실직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고용자 측의 용어로 번역한다면 소위 ‘노동 유연성’이 된다. 

이번 2015호 『대학신문』 기사에서 서울대 경제학부 김대일 교수의 말을 빌려 노동조합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노동자를 보호하려는 정책들을 비판한 부분을 보며 필자는 기업 측의 ‘노동 유연성’ 주장이 읽혔다. 그동안 보아 왔던 여러 상담사들의 두려움은 가려지고 마치 ‘전태일 정신’의 올바른 계승이 시장의 자유와 기업을 위해 번역된 듯 느껴졌다. 전태일은 기업을 살리기 위해 몸을 불사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필자는 상담사들에게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라’라고 감히 조언할 수 없다. 전태일 정신을 빌려서는 더욱 그럴 수 없다. 필자가 목격한 ‘노동’의 현실은 주체적이기에는 너무 두려운 현실이었다. 50년 전 전태일은 분명 노동운동에 앞서 여공들의 현실을 아파했을 것이다. 

 

김관욱 강사

인류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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