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이 만난 사람들 | 오혜진 문학평론가

인간의 본질을 파고들어 대중에게 보편의 감동을 선사한다는 평은 위대한 고전의 반열에 올라 있는 문학작품들이 최고의 찬사로 의식하는 문구다. 그런데 이때의 ‘보편’은 누구의 윤리, 누구의 세계일까? 인간의 표준으로 상정된 작품 속 등장인물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공존하는 이질적인 존재들의 삶을 충실하게 재현한 결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오혜진 문학평론가는 이런 엇갈림의 순간들을 포착해 이제까지 우리에게 당연한 준거로 공유돼 왔던 ‘한국문학의 정상성’에 질문을 던진다. 최근 비평집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2019)으로 웹진 ‘문화 다’에서 주최하는 ‘제2회 문화 다 평론상’을 수상한 오혜진 평론가는 한국문학과 문화의 장에서 논쟁적인 주제로 떠올랐던 소수자 재현의 윤리에 대해 페미니즘 담론을 중심으로 탐구해 온 ‘문화연구자’다. 비평이란 “자연스럽게 어떤 대상에 대한 의견을 갖고 이를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라며 그것이 자신에게 의도적인 별개의 행위가 아니라 “그저 세계를 좀 더 풍성하게 즐기고 싶은 마음의 실천”이라 말하는 오혜진 평론가에게, 한국문학·문화의 현주소와 더 많은 이들이 그 이야기를 풍성하게 누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물었다.

오혜진 문학평론가
오혜진 문학평론가

Q. 스스로를 “서사·표상·담론의 성 정치를 분석하고 역사화”하는 ‘문화연구자’로 소개했다.

내게 문학평론가라는 이름이 자주 붙는데 주로 하는 작업의 성격을 고려하면 문학평론가는 정확한 명칭이 아닌 것 같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문학평론의 상(像)은 대개 특정 작품에 대한 해설이나 평가로 고정돼 있다. 나는 문학뿐만 아니라 영화, 연극 등 여러 형태의 ‘서사’ 작품에 매력을 느끼고 재현의 한 종류인 ‘표상’에 대해서도 분석한다. 예컨대 ‘문학소녀’라는 표상이 있다면 역사적으로 형성된 이 이미지를 만드는 원리가 무엇인지 질문하는 식이다. 또한 문학 현상, 문화 현상을 둘러싼 ‘담론’의 양상에도 관심이 많다. 이렇게 문학을 특정 텍스트에 국한하지 않고 문화의 일환으로 연구하는 방식은 국내에서 2000년대를 전후해 새롭게 부상한 문학 연구 방법론에 해당한다. 나는 젠더와 섹슈얼리티 문제 즉 ‘성 정치’를 중심으로 해당 주제들이 지금까지 다뤄져 온 방식을 역사적으로 살펴보고 그 경향성을 연구하기에, ‘문화연구자’로 스스로를 소개하는 것이 익숙하다. 

Q. 2015년을 전후해 한국문학과 비평에서 주류 담론이 ‘이성애자-선주민-비장애-남성-지식인’의 문학이었다는 점과 이를 공고히 하려는 제도권의 퇴행적인 욕망이 여러 혐오, 순문학주의, 계몽주의, 세계문학상 집착 등의 폐습을 낳았다는 점을 비판한 바 있다. 이런 문제의식과 관련해 그간 한국문학장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이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궁금하다.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Feminism Reboot)*와 함께 신경숙 표절 사건,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 ‘#MeToo’ 운동 등 기준점으로 삼을 수 있는 주요 사건들을 거론할 수 있겠지만, 사실 이 모든 것이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니다. 그간 젊은 세대가 가지고 있던 관심사, 지식, 교양, 정보 등이 축적되면서 하나의 큰 흐름이 등장한 것이고, 한국문학장의 변화도 그 흐름과 상호적인 영향을 주고받은 것일 테다. 

당시 내가 강하게 지적했던 한국문학의 부후한 관성, 그리고 그에 대응해 나타난 진보적인 움직임은 문학장 내에서의 변증법적 갱신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기실 이런 과정은 계속 반복돼 왔다. 1990년대에 여성문학이 득세한 것이 그 이전에 여성을 계속 주변화했던 흐름에 대항하는 움직임인 것처럼 말이다. 물론 문제를 다루는 방식들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또다시 비판받기도 하지만, 그 역시도 결국 이와 같은 문학적 실험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과정이라고 본다. 2015년을 전후해 크게 터져 나왔던 목소리들은 지금 이 시대의 민주주의를 계속 확장하고자 한다면 더 많은 소수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담론 양식을 구축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자연스럽게 주변인, 소수자의 정체성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면서 그 존재가 더 ‘잘 보이게 되는’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이전에는 이들에 대한 탐구를 문학의 영역에 포함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런 관심사가 문학의 레이더망이 포착하는 대상이 된 것, 그것이 변화라고 생각한다. 

Q. 변화만큼이나 새롭게 나타난 문제점들도 많다. 「비평의 백래시와 새로운 ‘페미니스트 서사’의 도래」(2018)에서는 페미니즘 담론을 둘러싸고 ‘정치적 올바름’을 논하는 단선적인 방식을 비판한 바 있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줄여서 ‘PC’라 일컬어지는 이 개념은 1970년대 미국에서 흑인민권운동이 일어나던 시기에 사용되기 시작했던 말이다. 그간 흑인의 경험과 역사가 소외돼 왔기에 흑인들은 정치적 평등과 권리를 요구하며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주체적인 담론을 발전시켰다. 그러자 백인 가운데 자신들만의 커뮤니티를 만들어 흑인민권운동을 좌절시키기 위해 운동론자들의 언어를 갈취하는 현상이 나타났는데, 정치적 올바름 역시 이때 부정적인 의미로 변질했다. ‘흑인들이 결속하니 우리 백인들 역시 결속하는 것’이라며, 정치적 올바름을 반동적인 의미로 오·남용해 실질적인 평등을 상상하는 이들의 언어에서 피상적인 명분만 취한 것이다.

한편 한국에서 1990년대에 일종의 유행어로 등장한 이 단어는 ‘어느 정도의 PC함은 기본적으로 갖춰야 한다’라는 식의 비교적 긍정적인 의미로 통용됐다. 그런데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페미니즘 담론을 둘러싸고 한국에서도 정치적 올바름의 개념이 오·남용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여성 차별, 소수자 차별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질 때, 그와 같은 페미니스트의 의견에 반발하고 싶은 일종의 ‘백래시’(Backlash)*로서 페미니스트 언어들을 다시금 정치적 올바름을 검열하는 기제로 취급하는 목소리가 등장한 것이다. 이들은 페미니스트 언어가, 현실의 복잡함을 사산시키고서 정말 올바른 것만을 추구하겠다는 식의 도덕적 근본주의에 사로잡힌 사상이라 치부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의 기저에는 페미니즘 담론에 대한 숙고 없이 반발심만을 내비치고 싶어 하는 심리가 숨어 있으며, 이는 궤변이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생각할 필요도 있다. 페미니스트 언어를 무조건적인 매뉴얼로, 치안(治安)의 언어로 치부하는 것은 부당하지만, ‘정치적 올바름을 ‘물신화’하지 않는 페미니즘 서사는 어떻게 가능할까’ 질문함으로써 기존의 정치적 올바름의 개념을 다층적으로 살펴보고 적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과도한 믿음의 체계를 구겨 넣는 와중에 실질적인 문제를 누락시킬 위험은 모든 이데올로기가 빠질 수 있는 맹점인 것 같다. 

Q. 비가시화됐던 주체들에 관한 담론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 이들이 처했던 삶의 조건과 그 산물을 어떻게 ‘역사화’할 것인지에 관한 문제를 최근 집중적으로 다뤄 왔다. 어떤 예시가 있을까.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대중이 의식적으로 각성되면서 여성과 소수자들의 역사가 대체로 비가시화되거나 누락돼 왔다는 생각을 공유하게 된 것 같다. 이에 기존의 역사 서술에는 포함돼 있지 않았던 주체들의 잊힌 역사, 삭제된 역사를 발굴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예컨대 ‘왜 독립혁명가들은 다 남성일까’ 질문하며 여성 운동가를 찾는 데 골몰하는 식이다. 그런 노력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다시 한 번 비판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소수자의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이, 기존의 이성애자 남성 중심의 역사에 예외적인 여성의 사례를 추가하는 방식만으로 충분할까?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이광수, 염상섭, 김동인은 그렇게 유명한데 왜 나혜석과 김명순은 이야기되지 않는지 물으며 나혜석에게 ‘근대 최초의 한국 여성 작가’라는 칭호를,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 정말 효과적일까? 

본인의 굉장한 노력이 따랐겠지만, 부잣집 딸이었고 글을 배울 수 있었고 유학을 갈 수 있었던 나혜석은 그 당시 매우 운이 좋은 사례였다. 실제로 1890~1920년대에 살았던 여성들은 대부분 그 모든 기회로부터 소외돼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혜석의 사례만을 강조하고 위시하는 것이 어쩌면 여성의 삶을 역사화하는 데 그렇게까지 생산적인 방식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 위인의 이름을 계속 발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존 역사가 계속해서 ‘최초의’, ‘위대한’이라는 자격을 붙이며 역사적 권위를 부여해 온 방식을 따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주류 역사를 서술하는 권력 계층이 분명 여성의 역사를 비가시화하고 누락한 것도 맞지만 한편으로는 여성들이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 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자료를 보면 여성 독립혁명가는 정말로 드물다. 여성 혁명가는 대놓고 여성 혁명가라는 직함을 갖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들은 문면에 드러나는 방식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한국 독립운동사, 사회주의 운동사에서 여성 혁명가들의 일대기를 문학적으로 복원한 아주 드문 사례인 조선희 작가의 『세 여자』(2017)에 등장하는 ‘주세죽’, ‘허정숙’, ‘고명자’는 사실 ‘박헌영’, ‘임원근’, ‘김단야’와 같은 유명한 남성 혁명가들의 부인, 연인, 딸 등으로 알려져 있었던 이름들이다. 이들이 여성 혁명가로 존경받게 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인데, 그렇다면 왜 그간 이런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나. 그것은 이 여성들의 존재 방식이 역사적 기록에 거의 남아 있을 수 없었던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문학연구자 장영은의 연구에 따르면, 하우스키퍼, 아지트키퍼로 존재했던 당시 여성 혁명가들은 사회주의자들이 모여서 회의를 할 때 밥 차려 주고, 집 치워 주고, 때가 되면 빨래해 주는 식으로 일조했다. 『세 여자』를 읽은 독자들은 ‘주세죽이 왜 끊임없이 현모양처의 성 역할을 감내해야 하는가’ 질문하지만, 사실 그런 평가가 주세죽의 주체성을 삭제하는 측면이 있음을 짚어내야 한다. 여성은 그 당시 남성과 연결되지 않으면 어떤 네트워크에도 접속할 수 없었고, 공적인 앎을 습득하기도 쉽지 않았다. 또한 결혼하지 않는 여성은 계속해서 주변의 이목을 끌고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때문에 차라리 그 시대가 인정하는 여성의 시민권을 얻을 수 있는 삶을 살면서 자기 운신의 폭을 넓혀 간 방식이 여성 혁명가들이 주체적으로 선택한 방식이었을 것이라 풀이할 수 있다. 

요새 집중하고 있는 ‘소수자의 존재론’, ‘역사화’ 연구는 이런 맥락에서 그 당시 소수자의 삶의 조건, 존재론적 특이성을 잘 보존할 수 있는 새로운 감수성, 인식론, 언어를 찾으려는 시도다. 그 답이 무엇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무엇이 역사가 될 만한 것인가’의 기준이 바뀌어야만 길이 열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수자의 역사가 기존의 역사를 더 대단하고 강고하게 만드는 부록이나 대안으로만 남지 않기 위해서는 이처럼 질문 방식을 달리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Q. 동시대의 사회·문화적 사건이 촉발한 문제의식과 이를 둘러싼 정치적 지형도 속에서 문학 역시 오늘의 민주주의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질문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공동체 윤리에 대해 그간 논해 왔던 ‘당사자성’과 관련해 이야기한다면. 

이질적인 존재들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 모두의 삶의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사회에서 동질성의 신화는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그런 가운데 이 사회의 정상, 보편을 식별해 내는 것이 아니라 누가 어떤 방식으로 정상성을 구축하려 하는지 질문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종종 내가 당사자가 아니므로 소수자의 이야기를 상상할 수 없다는 식으로 ‘당사자성’의 논리를 펴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요즘 당사자성 문제를 꺼내는 방식은 윤리적 성찰을 빙자한 윤리의 방기라는 생각도 든다. 예컨대 ‘내가 퀴어가 아닌데 퀴어문학을 해도 괜찮은 걸까’ 묻는 질문들.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감정을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정말로 살펴봐야 하는 것은 ‘그런 질문을 왜 어느 집단에는 던지고 어느 집단에는 던지지 않는지’의 문제다. 어째서 퀴어, 장애인, 참사 사건의 유가족들 등 몇몇 특수한 집단들을 호명하고서 그들과 이야기할 때는 당사자성의 장벽을 드리우는 것인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의 이야기 혹은 노동자의 이야기를 할 때는 굳이 그러지 않는데 말이다.

진짜 중요한 것은 ‘그들의 문제를 내 문제로 구성할 수 있는 질문을 어떻게 던질 것인가’ 하는 지점이다. 예컨대 퀴어문학을 성 소수자 커뮤니티 게시판에만 올리지 않고 작품을 발표해 한국문학의 영역에서 논하는 것은, 성 소수자가 차별받는 위치에 있게 만드는 한국 사회의 질서, 관성, 암묵적으로 합의된 시민권의 법칙을 질문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때 질문을 받는 당사자는 한국 사회 전체의 구성원들인 것이다. ‘어떤 지점에서 어떤 순간에 내가 해당 문제의 당사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문화예술은 이런 방식으로 계속해서 당사자성의 의미를 탐구하고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Q. 마지막으로 『대학신문』의 독자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있다면.

어떤 주제를 생각할 때 보다 다양한 의견을 접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했으면 좋겠다. 누구나 자기가 가진 삶의 조건 내에서 가장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그 말이 왜 가장 그럴 듯하게 생각되는지, 다른 주장은 어떤 근거와 바탕을 지니고 있는 것인지 의식적으로 숙고하는 시간을 최대한 많이 확보할 수 있으면 좋겠다. 최근 한국문학 작품들을 들여다보면 사실 등장하는 직업이 그리 다양하지 않다. 작가, 기자, 강사, 교수 정도. 취재를 나서서 의식적으로 다양한 세계를 그리려는 노력도 분명 있으나, 책상 앞에서 상상할 수 있는 먹물의 세계, 화이트칼라의 세계, 중산층의 세계에 오랫동안 한정돼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문학작품이 이 세계를, 이 우주를 무궁무진하게 담아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인간의 상상력은 생각보다 무한하지 않다. 사는 대로 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윤리적인 질문을 떠올릴 때 그 윤리가 누구의 윤리인지 따져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테두리 지은 세계의 너머를 의식적으로 감각하는 것, 그런 시도가 스스로를 좀 확장해 줄 수 있지 않을까.

 

*페미니즘 리부트(Feminism Reboot): 2015년 전후로페미니즘이 새롭게 논의된 맥락을, 이전에 존재했던 여성 운동이 신자유주의의 실패와 맞물려 쇄신의 필요성을 맞은 것으로 분석하며 정립한 개념 

*백래시(Backlash): 사회·정치 변화로 인해 자신의 중요도와 영향력, 권력이 줄어든다고 느끼는 불특정 다수가 강한 정서적 반응과 함께 변화에 반발하는 현상

 

사진: 김가연 기자 ti_min_e@snu.ac.kr

삽화: 김지온 기자 kion27@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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