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 생활 내내 날 이끌어 주던 선배는 학교를 떠날 채비를 하고, 함께 졸업할 것만 같았던 동기는 휴학을 준비하고, 한때는 까마득한 어른이라 여겼던 나이에 나는 가까워진다. 신문사는 이번 학기 종간을 목전에 두었다. 적게는 네 학기, 많게는 다섯 학기까지 이곳에 몸담았던 사람들이 떠나고, 남은 사람들은 그들의 일을 이어받아 이번 학기 마지막 호를 펴내고 다음 학기를 꾸려 갈 준비를 한다. 

학보사 입사 지원서를 쓰던 지난 초여름이 기억난다. 지원 자격은 ‘3학기 활동 가능한 서울대 재적 학부생 또는 대학원생’이었고, 나는 내게 남은 학기를 세는 일이 세 손가락으로 충분하다는 걸 알게 됐다. 언젠가 지원서를 쓰려다 ‘나는 부족하다’라는 생각으로 포기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라는 심정으로 지원서를 썼다. 그 후 폭풍 같던 기말고사 기간의 어느 날엔 입사 면접을 봤다. 문제는 21학점 꽉 채워진 나의 2학기 시간표였다. 데스크는 내가 전공 공부와 신문사 일을 병행할 수 있을지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나 역시 신문사 생활에 관해선 아는 바가 없었기에 무턱대고 해낼 수 있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건네받았던 “좋아하는 일은 시간 날 때 하는 게 아니라 시간 내서 하는 것”이라는 문장이 떠올랐고, 나는 그 말을 다짐하듯 힘주어 줄줄 읊었다. 전공 시험 준비로 머리가 터질 것 같던 어느 새벽에 합격 문자를 받았을 땐 가슴이 부산하게 뛰었고, 그렇게 나는 기자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지난 학기에 발행된 신문을 읽던 리뷰 주간, 다가올 학기를 준비하던 기획 주간, 정년을 맞이한 교수님들을 찾아뵙던 며칠과 특집 기사를 준비하기 위해 발을 구르던 나날, 그런 것들이 한여름에 다 있다. 전화를 돌리고 기사 소재를 발제하고 회의하고 기사를 쓰고 이따금 주말에 출근하고 열심히 신문사의 휴간을 빌다 보니 완연한 가을이었다. 휴간이 끝나고 신문사로 돌아와 일상을 반복하니 가을은 온데간데없이 겨울이 왔으며, 이 글을 쓰고 나면 이번 학기 신문사에서 내게 주어진 일도 끝난다. 이번 학기 내내 나는 부지런히도 두려워했던 것 같다. 전화기 너머에서 차가운 음성이 들려오진 않을까, 멍청한 질문을 건네고 있는 건 아닐까, 누군가의 말을 곡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 엉망진창인 문장만 휘갈기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걱정이 일상에 스몄다. 취재와 기사 작성과 회의, 시험과 과제와 실습. 시소 한가운데를 외발로 딛고 서 있는 사람처럼 균형을 잃고 무너지는 내 모습을 자꾸만 상상했다. 불안감은 하루가 다르게 제 모양새를 바꿔댔고 나는 매일매일 딱 하루 치의 불안을 겨우 견디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보거니와, ‘어떻게든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라는 사실만으로 신문사에서의 시간을 견뎌야 했더라면 나는 일찍이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신문사 편집국 책상에 앉아 있노라면 궁금해졌다. 저 사람은 어떤 마음으로 그리 기사 작성에 골몰하나, 이 사람은 어쩌면 본인과 무관할지도 모르는 일에 이리도 뜨겁나, 우리는 왜 시간에 쫓기며 일을 하다가도 이따금 넋 놓고 웃어버리는 걸까, 한바탕 웃음 짓고 나면 왜 나는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될까. 앞으로도 계속 이 일을 배워나가다 보면 언젠가 그런 의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곤 했다. 

그러다 얼마 전 내가 졸업을 위해 다음 해에 소화해야 할 일정을 구체적으로 알게 됐다. 그간 학부 마지막 학년의 일정에 관해 선배들에게 전해 들은 바가 없진 않아 어렴풋이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1년의 일정을 달력에 옮기고 나니 느낌이 사뭇 달랐다. 선배와 상담까지 하고 나니 학업과 신문사 일을 병행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게 사실처럼 다가왔다. 이번 학기에 그랬듯 다음 해에도 해낼 수 있을 것이라 막연히 생각해왔던 나는 학업과 신문사 일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자 망설임 없이 전자를 택했다. 그 선택이 부끄러워 혼자 며칠을 끙끙댄 뒤에야 출근한 어느 날에 사람들에게 겨우 소식을 전할 수 있었다. 이해하는 얼굴로 내 구구절절한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들과 함께 있던 시간을 오래 기억할 것이다.

계절은 부지런히 바뀔 것이고, 그러는 동안에도 나는 몇 번이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내가 힘주어 어떤 문장을 읊던 순간에 대해, 당연하다는 듯 신문사 활동을 이어나갈 거라고 말하던 시간에 대해, 망설임도 없이 학업을 택하던 손길에 대해. 입사하며 약속한 기간을 다 소화하고 퇴임하지도, 이곳에 남아 앞으로의 일들을 해나가지도 않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지면을 내어준 당신들에게 염치도 없이 말하고 싶었다. 감사했다고, 나는 어딘가 뜨거운 당신들을 나아가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척 궁금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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