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학과 정용욱 교수
국사학과 정용욱 교수

‘탈’자가 붙는 이론이나 사상 조류가 넘쳐나는 시대다. 포스트모더니즘이 한국 지성계에 유입돼 근대주의적 사고에 대한 학계의 맹신에 경각심을 일깨운 것이 이미 오래전 일이다. ‘탈’자 이론들이 한국 사회에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운을 맞추려 그랬는지 탈냉전기가 시작되는 1990년대부터다. 탈근대주의에 이어 탈식민주의, 탈민족주의가 제기되고, 포스트 페미니즘이 등장하더니 이제는 탈진실(Post-truth) 시대란다.

새 조류에 새 이름을 짓지 않고 이미 사용하던 용어와 개념에 ‘post-’라는 접두사를 붙여 표기한 이유는, 앞의 조류를 낡은 것으로 간주하고 자신을 뒤 시기의 새것으로 강조하기 위해서거나 기존 조류를 뛰어넘는 대안으로서 자기 존재를 드러내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일상의 화법을 따르자면 사물을 새롭게 보거나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기가 필요할 때, 또는 역사적 맥락의 전환과 삶의 조건의 획기적 변화가 과거의 틀을 벗어날 필요를 제기할 때 접두사 ‘탈’이 등장하는 것이리라. 대학에 몸담은 사람으로서 ‘탈’자 이론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낙후한 지식인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지 않기 위해 나름 꽤 노력하는 터이지만, 탈진실이라는 용어가 일상생활에서 공공연히, 또 공론의 장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현실은 다소 당황스럽다.

‘탈진실’은 아직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오르지 않았으나 국립국어원이 개설한 위키피디아 격의 우리말샘에는 올라 있다. 탈진실은 ‘진실에서 벗어난다는 뜻으로, 객관적인 사실이나 진실보다 개인의 신념이나 감정이 여론 형성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이르는 말’이다. 한마디로 진실에 대한 객관적 기준이 더 이상 공유되지 않는 것을 지칭하는 철학적·정치적 개념으로,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2016년 ‘탈진실’을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다.

탈진실은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와 브렉시트 덕분에 ‘올해의 단어’로 등극했다. 여론조사의 예상과 달리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민주당이 지지기반으로 여기던 제조업 기반의 중서부와 동북부 지역 백인 노동자들이 트럼프 쪽으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이는 노동으로써 중산층 지위를 유지하던 러스트 벨트의 제조업 종사자들과 중서부 농업 종사자들의 경제적 몰락, 미국 사회의 심각한 양극화, 제도권 정치에 대한 그들의 불신이 임계점에 달했음을 보여준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가 초래한 팬데믹의 여파가 이 단어의 전 세계적 확산을 돕고 있다. 팬데믹이 인간 사회에 작동하는 방식은 한결같지 않아서 아무래도 경제적 약자들이 역병에 더 취약할 수밖에 없다. 올해 미국 대통령 선거, 유럽이나 중남미에서 방역을 위한 통제의 해제를 요구하며 빈발하는 시위에 나타나듯이 팬데믹으로 심각한 생활고를 겪으며 생존의 위기로 내몰린 실직자와 자영업자, 몰락하는 중산층과 빈곤층이 거리로 뛰쳐나와 “코로나19는 없다”고 외치며 마스크를 쓰지 않을 자유와 권리를 주장하고, 극우 정치 세력은 그것을 부추겨 세력 확장의 기회로 삼는다. 한국에서 코로나19 1차, 2차 확산의 도화선이 됐던 것은 특정 종교와 교회였고, 2차 확산의 경우 ‘아스팔트 보수’의 정치 집회가 한몫했다.

탈진실 정치가 활개치는 곳에서는 거짓과 음모론, 심지어는 폭력적인 위협이 과학과 상식, 공개적인 토론과 소통을 대신한다. 그 기저에 점차 심각해지는 사회경제적 양극화, 정치적 불신과 기존 체제에 대한 불만, 그것을 자양분으로 세력을 부식하는 극단주의 세력이 자리한다. 그리고 가짜뉴스의 양산과 보급이 탈진실 정치를 유지·확산하는 동력 구실을 한다. 언제부턴가 한국도 4~5종의 신문과 방송 보도를 종합해 보고서야 문제의 골자를 겨우 포착하고, SNS로부터 더 많은 정보와 뉴스를 얻는 사회가 됐다. 언론자유의 신장과 SNS의 확대가 역설적이게도 왜곡과 편파 보도, 확증편향을 구조화하고 있다.

본부와 학생 대표가 진작에 인권헌장에 합의하고도 이를 제정하지 못하고 있다고 들었다. 합의한 헌장대로 하루빨리 제정되기를 바란다. 서울대 교표에도 박혀 있듯이 진리는 여전히 우리의 빛이고, 이성적 사유와 공개적 토론이야말로 성과 속을 구분하거나 탈진실의 기획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수단이다. 더 많은 토론과 참여, 투명한 정보 공개, 상대방의 개성을 존중하면서도 약자를 더 배려하는 공동체적 연대 의식이야말로 K-방역을 낳은 원동력이자 탈진실의 늪을 벗어나는 출로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