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고도 먼 사이, 그 이름은 가족 정진숙(지리학과ㆍ02)

‘가족’이라는 단어를 머리 속에 떠올려 보면 그것은 너무나도 따뜻한 단어인 동시에, 한편으로는 불편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단어로 느껴진다.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기에 가까운 듯하면서도, 나를 진정 이해해주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 타인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개인마다 똑같은 이름의 가족을 가지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다들 너무나도 다른 가족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가깝기에 서로를 이해하기보다는 이해받고 싶어한다는 것, 그것으로 인해 서로 쉽게 상처를 입곤 한다는 사실은 어느 가족에서든 마찬가지다. 이 연극은 그러한 평범한 한 가족의 일상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마치 그 연극 속에 내 자신이 들어가 있는 것처럼 지극히도 현실적으로 말이다.

80년대 초반 가난했던 시절. 가족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아빠, 자식들이 자신의 꿈이라고 이야기하며 아빠와 처음 만났을 때의 설렘을 기억하는 엄마, 그리고 성희, 경희, 소희 세 명의 딸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간다. 웃음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겉으로 보기에는 정말 단란하고 행복해 보이는 가정이다. 하지만 전셋값을 올려달라는 요구에 걱정하는 부부, 결혼을 하고 싶지만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고민하는 큰 딸 성희, 막내와 항상 소리치며 싸우고 장난치는 둘째 딸 경희, 대학에 가고 싶어 하지 않는 막내 소희의 모습은 비단 어려웠던 그 시절만의 얘깃거리는 아니다. 우리 집에서, 그리고 어느 집에서나 그 모습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시간이 많이 흐른 후, 막내 딸 소희는 과거를 되돌아보며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가족사진처럼 그 모든 것이 그대로일 수는 없다. 그리고 그 모습을 다시 찍을 수 없는 것처럼 그 기억도 되돌릴 수 없다. 사랑하는 부모님은 이미 그녀의 곁을 떠났고 자신은 엄마를 닮은 모습으로 엄마의 모든 것을 이해하며 살아간다.

가족이라고 해서 서로 눈빛만 봐도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초능력자는 아니다. 분명한 사실은 누군가가 먼저 다가가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족 안에는 연극처럼 쉬운 울음과 웃음으로 넘어갈 수 없는 문제가 존재한다. 그것은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구조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가족이라는 제도 안에 내포돼 있는 가부장성이 부여하는 역할모델에 충실해야만 했기 때문에 그 작은 상처하나 쉽게 이야기할 수 없다. 또한 절대적인 사랑으로 포장된 서로의 요구 대문에 생기는 이해의 불일치에서 비롯된 갈등도 있다. 가난한 엄마가 세 딸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매일 우유를 한 잔씩 주는 일이다. 그것은 엄마가 딸을 사랑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우유를 먹을 것인지 안 먹을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 사랑의 잉여감정이 존재함으로써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의 차이에 생겨난다.

하지만 이런 요소를 비판하면서도 지울 수 없는 감정이 존재한다. 우리는 가족이기 이전에 개인으로서 용기를 내지 못한다. 자신의 언어와 생각의 나열에만 급급하거나 쉽사리 감정을 드러내지 못한다. 안 보는 사이에 감자에 싹이 금방 나는 것처럼,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동안 서로의 가슴에 상처가 자라난다. 그것은 썩어서 못 먹게 되고 결국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러한 기억은 결국 막내 딸 소희처럼 나이가 들고 좀 더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더 큰 상처와 눈물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주어진 현실에서 서로에게 솔직하고 담대해져야 한다. 현실에 최선을 다하라는 말은, 비단 성공을 위한 명언이 아니다. 가족 역시도 절실하게 인간관계를 고민해야 하는 공간인 것이다.

이 연극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가족에 대한 소중함이라는 일차적인 감정뿐 아니라 가족에 대한 소소한 추억과 그리움이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힘이 되어준다는 것이다. 그러한 기억이 좀 더 긍정적인 것이라면 더 좋겠지만 말이다. 이를 위해서 연극에서 작가가 충고하는 것처럼, 오늘 집에 들어갈 때 주머니를 털어 맛있는 간식거리를 사들고 “다녀왔습니다”하고 외쳐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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