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가락을 듣다 보면, 종종 해묵은 기억 조각들이 가락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경우가 있다. 출근하던 길에 들은 곡조에서는 새내기 무렵의 기억이 떠올랐다. 4년 전 대학 원서를 쓸 때만 해도 심리학에 대해 아는 바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당연히 상경대에 원서를 쓸 거라고 생각하며 수험생활을 보내며 경제학과, 경영학과를 졸업하면 뭘 하게 되는지만 찾아봤던 탓이다. 하지만 수능 날, 안정적으로 서울대에 지원하기에는 약간 모자란 점수를 받아 우연히 심리학과에 원서를 쓰게 됐다. 타짜가 된 심정으로 재수 학원 담임 선생님과 함께 왠지 입결이 낮을 것 같은 과를 골랐고, 하필 그게 심리학과였던 기억이 난다. 그때 심리학 하면 떠오르는 건 웹툰 <닥터 프로스트>나 환자의 눈 앞에 회중시계를 펼쳐놓고 최면을 거는 프로이트뿐이었다. 

그러던 글쓴이가 이제는 심리 치료의 문제를 주제로 기사까지 쓰고 있으니, 기사의 내용만큼이나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심리학이 문득 재밌다고 느꼈던 건 3학년 2학기도 지나서였다. 전공 수업을 10개쯤 듣다 보니, 뭘 배우는지도 모른 채 무작정 듣던 수업들의 결론이 어느새 한 방향으로 모이고 있다는 걸 우연히 체득하게 된 게 시작이었다. 심리학에는 인지심리학, 임상심리학, 사회심리학을 비롯한 다양한 분과가 있다. 수업을 듣다 보면 때로는 각 분야에서 다루는 내용이 생판 연계 되지 않는다고 해도 좋을 만큼 동떨어진 경우도 있다. 그러나 4학년 2학기가 된 지금 그동안의 수업에서 뭘 배웠냐를 되돌아보면 심리학이 주는 가르침은 하나였던 것 같다. 어떻게 하면 인간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 이해를 바탕으로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살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해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취재를 하면서 보게 된 현실은, 석사, 박사 학위까지 딸 정도로 배움을 이어 나간 선배들도 배운 바를 실천할 수 없는 부조리한 풍경이었다. <닥터 프로스트>에서 봤던, 하얀 방의 안락의자에 앉아 내담자가 정신 질환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돕는 심리학자의 모습은, 법적으로 따지면 의료법 위반이라고 한다. 심리 치료를 심리 치료라고 부를 수도 없어 다른 말로 바꿔 부르며 진료한다고 말하며 헛웃음 짓던 취재원이 떠오른다. 차라리 의료계와의 치열한 밥그릇 싸움 끝에 패배한 심리학자들이 치료할 권리를 빼앗겼다면 모를까, 그냥 임상 심리사와 그 자격증에 대해서 규정하는 법을 만들 때, 입법자들이 심리사가 무엇인지를 정하는 법을 빠뜨렸다는 이유에서 문제가 비롯됐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무지한 입법은, 연쇄적인 피해를 끼치기도 했다. 공인된 자격증이 없으니 이들이 시행하는 치료는 보험 처리가 안 돼 비싸지기도 했으며 사설 자격증의 난립으로 무자격자에게 치료를 받아 증상이 악화된 피해자들도 속출하고 있다. 부주의한 손에서 만들어진 제도로, 수많은 환자들과 현장의 전문가들이 피해를 보고 있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지난 주에 다뤘던 스토킹 처벌법도 같은 맥락의 문제였다. 해당 주제에 가장 높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법과 제도를 만드는 사람들의 무심함에 애먼 사람들이 피해를 보는, 동일한 구조에서 만들어진 부조리니 말이다. 이쯤에서 드는 생각은 수많은 문제들은 누군가의 무성의함으로 아무런 잘못이 없는 타인이 피해를 받게 되는 부조리한 구조 속에 똬리를 틀고 있다는 것이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다고 했다. 혹시 내 손에 돌이 주어진다면, 무작정 던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한 번쯤은 자각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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