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자를 위하여

박나영이 경자를 두 번째로 본 것은 눈과 비가 뒤섞여 내리던 십이월의 자정 무렵이었다. 밤과 새벽의 경계, 하루의 끄트머리와 새로운 하루의 시작점 사이에 있는 그런 시각. 본가에서 막 올라와 곧장 아무도 없는 연구 집필실로 온 박나영은 어둠에 스며든 채 의자에 앉아 책상 위로 어지럽게 쌓여 있는 책과 논문 더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창문에 달라붙었다가 흘러내리는 눈과 비의 그림자를 달빛이 켜켜이 쌓인 종이 뭉치 위로 쏘아대는 걸 보면서, 박나영은 쿠미 야마시타의 작품을 떠올렸다. 현재와 과거, 허구와 진실에 대한 착시를 보여주는 빛과 그림자의 예술. 하지만 몇 시간째 뒤통수에 머물러 있는 저릿한 감각과 간헐적으로 몸을 관통하는 오한이 박나영을 이내 현실로 잡아끌었다. 

박나영은 조금 전 김여사와 나눈 대화를 곱씹어 보았다. 무언가 해야겠지, 무의식적으로 다짐하면서도 무엇을 해야 할지, 그보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머릿속을 시끄럽게 부유하는 문장의 조각들을 하나씩 끼워 맞춰보려고 애쓰고 있을 때 박나영은 낯익은 기척을 느끼곤 책상 아래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닥에 놓인 종이 박스 위에 경자가 있었다. 경자는 처음 봤을 때 보다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가 모습을 감췄다. 박나영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불을 켠 뒤 바닥에 한쪽 뺨을 붙이고 책꽂이 아래를 살펴봤지만, 경자는 거기에 없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어둠 속에서 빛나는 경자의 눈을 똑똑히 보았다고 박나영은 확신했다. 경자가 실재한다는 사실에 박나영은 눈이 쌓이듯 머릿속 상념들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박나영이 느낀 것은 그러니까, 안도감이었다. 

*

지난 주 박나영은 지방에 위치한 어느 대학병원 장례식장으로 가기 위해 올라탄 KTX 안에서 이교수의 전화를 받았다. 별다른 말없이 다음 주에 한번 들르라는 이교수에게 본가에 내려가고 있다는 사실은 생략한 채 박나영은 알겠습니다, 하고 전화를 끊었다. 다음 주면 사실상 학기가 마무리될 것이고, 박나영은 그 전에 서울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얼굴도 가물거리는 고모로부터 연락을 받은 것은 오전이었지만 수업이 끝나고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기차에 오른 터였다. 삼사일이면 충분하겠지. 지인들의 상갓집에는 몇 차례 가본 적이 있던 터라 대략 어림잡을 수 있었다. 아버지의 장례식이라고 뭐 다를 게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박나영은 노트북을 열어 학생들이 제출한 기말 과제 폴더를 열었고 저녁을 먹지 못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허기가 느껴졌다.

장례식장 복도에 들어섰을 때 박나영의 눈에 처음 들어온 것은 교회명이 적힌 화환이었다. 빈소에는 오수진과 그녀의 아들이 검정 상복을 입고 앉아 있었다. 이제 갓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그녀의 아들은 검은색 두 줄 띠가 둘러대진 누런 완장을 한쪽 팔에 차고 있었다. 오랫동안 알고 지냈음에도 영정 사진 속 얼굴에 떠올라 있는 엷은 미소는 낯설게만 보였다. 향에 불을 붙이고 잠시 눈을 감았다 뜬 박나영은 오수진과 그녀의 아들을 향해 목례를 했다. 분향을 마친 후 피가 섞인 사람들과 전혀 섞이지 않은 사람들, 그리고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사람들과 어색한 인사를 나누는 동안 박나영은 그 얼굴들이 자신에게서 무엇을 기대하는지 알지 못한 채, 내내 울음과 웃음 사이에서 서성대는 표정을 지어야 했다. 이윽고 접객실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나서야 박나영은 편육과 육개장을 먹으며 간신히 허기를 달랠 수 있었다.

박나영이 박사장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일 년 전 여름이었다. 십 년 만에 만난 박사장에게서 박나영은 한겨울 나무 같은 인상을 받았다. 이파리들을 걷어내고 비로소 자신의 몸통을 드러내지만 누구의 시선도 끌지 못하는 겨울 나무. 한여름인데도 박나영은 이런 박사장에게서 한기를 느꼈다. 박사장은 박나영을 차에 태워 제법 멀리 떨어져 있는 고깃집으로 데려가 저녁을 사주고는 다시 집 앞으로 데려다주었다. 박나영이 차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박사장이 작별 인사라도 하듯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아무 말 없이 봉투를 받아들고 차에서 내린 박나영이 집에 돌아와 봉투를 열어보니 오만원권 지폐 스무 장이 들어있었다. 백만 원이었다. 박나영은 봉투를 그대로 서랍에 넣어두고 다시 열어보지 않았다.

태어날 때는 출생 신고 하나면 충분했을 것이 죽을 때가 되자 온갖 서류로 불어난 것을 보며 박나영은 화환에 새겨져 있던 성경 문구를 떠올렸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지리멸렬한 일들을 처리하며 박나영은 발인 날까지 더디게 흘러가는 시간을 견디어 냈다. 마침내 화장터를 거쳐 봉분을 마치고 산에서 내려왔을 때는 점심을 훌쩍 넘긴 시각이었다. 단체 버스를 타고 점심을 먹기 위해 친척들과 산 밑에 있는 식당에 들렀을 때 박사장의 동생, 그러니까 박나영에게는 작은 아버지 되는 사람이 운을 뗐다. 네 아버지가 유언장을 남겼다. 이 말이 신호라도 되는 듯 오수진이 아버지의 유언장을 박나영 앞으로 들이밀었다. 유언장 위로 문장 하나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나 박창수 사망 시에 모든 재산은 아들 박규민이 갖도록 한다. 

삼 일 만에 처음으로 가슴이 요동치고 뒤통수가 조여왔다. 피가 뜨겁게 끓어올라 정수리를 태운 후 차갑게 식으며 몸을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박나영은 공증 받은 유언장임을 거듭 강조하는 작은 아버지의 말을 뚝 잘라냈다. 그러자 오수진은 조그마한 갈색 수첩 하나를 꺼내 펼치고선 잠시 바라보더니 펼친 면에 눈을 고정시킨 채 말했다. 우리도 너한테 할 만큼 했어.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키워줬는데 집을 나간 건 너였잖아. 짧은 침묵 후 오수진은 박나영을 쳐다보며 덧붙였다. 

-너는 상복도 안 입었잖아.

박나영의 뒤통수를 조여왔던 감각은 유언장의 내용보다도 유언장 어디에서도 자신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박사장의 유언장은 박나영을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박나영이라는 이름의 부재. 박나영이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었다. 희미한 기억을 헤집어 보았지만 박나영은 박사장이 딸과 아들을 차별했던 기억은 찾지 못했다. 그는 형편없고 무책임한 아버지이기는 했지만 적어도 성별로 자식을 구분하는 문제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박나영이 스무 살이 되던 해 독립한 까닭은 자신이 완벽한 가족에 끼어있는 잡음 같은 존재라는 느낌, 그뿐이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김여사는 박나영이 전해준 소식을 대강 듣고선 핸드폰 너머로 나무라듯 대꾸했다. 

-원래 네 아빠 아들 아들 했어.

변호사를 알아보든 어쩌든 뭐라도 하라는 김여사의 재촉이 이어졌지만 박나영은 연구실로 오는 내내 뒤엉킨 기억과 분투해야 했다. 아빠가 아들 아들 했었다고? 박나영은 자신의 확고했던 기억이 금 가기 시작했음을 어렴풋이 감지했다. 경자를 두 번째로 마주쳤을 때 박나영은 그렇게 자신의 기억과 싸우는 중이었다.

*

박나영의 지도교수인 이교수는 학부를 마친 후 영국에서 예술비평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자교 교수로 임용되어 학생들 사이에서 숭배에 가까운 인기를 얻고 있는 젊은 여교수였다. 이교수는 박나영과의 첫 면담에서 데이비드 호크니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박나영의 이야기를 듣고선 바바라 크루거나 신디 셔먼 혹은 셰리 레빈으로 논문 주제를 돌려볼 것을 제안했다. 요즘에는 정체성, 혼종 이런 거 해야 돼, 라며 이교수는 참고도서 몇 권을 일러주었다. 박나영은 딱히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크게 개의치도 않았으므로 이교수의 제안을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 별 탈 없이 박사 학위를 받는 것이 박나영의 바람이었다.

경자를 처음 본 날 박나영은 집필실에서 크루거, 셔먼, 레빈의 작품을 구글링하면서 뒤적거리고 있었다. 코스를 마치고 이교수 아래서 논문을 준비한 지 벌써 일 년째였다. 몇 해 전 이들의 작품을 관람하기 위해 대학원 동기와 함께 아라리오 뮤지엄에 들른 적이 있었다. 교환학생이나 어학연수 경험조차 없는 박나영은 YBA의 작품들을 직접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부풀었지만,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하는 건 트레이시 에민이나 사라 워커스의 작품이 아니라 신디 셔먼이 예뻤다는 사실이었다. 저 정도 되니까 셀프 포트레이트 한 거 아냐, 동기가 입술을 샐쭉거리며 던진 말이 떠올랐을 때 주변시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노트북 불빛마저 잘 닿지 않는 책상과 벽에 붙은 책꽂이 사이에 놓아둔 종이 상자 위에 경자가 있었다. 경자는 박나영의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듯 움직임을 멈추더니 이내 책꽂이 아래 틈으로 사라져 버렸다. 박나영은 얼어붙은 채 경자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고등학교 시절 오수진이 도시락을 가져다주러 교실에 들어 왔던 때가 떠올랐다. 박나영은 그 때도 얼어붙은 채 오수진을 바라보기만 했었다. 오수진이 박나영이 앉아 있는 책상 위에 도시락 상자를 올려두고 교실 밖을 나갈 때까지. 오수진이 박나영이 다니는 학교를 찾아 온 것은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박나영은 불을 켜고 근처를 조심스레 살펴봤지만 어지럽게 쌓아놓은 책과 논문 더미 외에 새로운 것은 발견하지 못했다. 경자를 다시 보기까지 며칠 동안 박나영은 스스로의 기억을 의심했으므로 두 번째로 경자를 본 날 박나영이 느꼈던 안도감은 자신의 기억이 옳았음에 대한 확신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

그러니까 실험실 쥐 같은 거 말이야? 조영희가 물었다. 장례식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온 다음 날, 그러니까 경자를 두 번째로 마주친 다음 날 점심에 박나영은 학교 근처 조그마한 한식집에서 조영희를 만났다. 고등학교 동창인 조영희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결혼해 가장 먼저 아이를 낳았다. 오전에 박나영의 연락을 받은 조영희는 다섯 살짜리 딸을 어린이집에 오후까지 맡겨두기로 하고 박나영에게로 달려와 주었다. 경자를 마주친 이야기를 이어 가려는데 지금 쥐가 문제냐고, 조영희가 딸을 나무랄 때와 같은 투로 타박했다. 경자년에 졸업하는 게 목표라고, 그래서 경자라고 이름 붙였다고, 조영희의 타박에도 박나영은 말을 이었다.

-그럼 흰색이었어? 경자는 흰 쥐라는 뜻이잖아.

조영희는 한 숨을 내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박나영의 말을 받았다. 박나영은 경자가 무슨 색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불이 꺼진 집필실은 대낮에도 어두웠고, 경자를 마주친 순간은 두 번 모두 워낙 찰나에 불과했다. 이름대로라면 경자는 흰 쥐여야만 했다. 그런데 박나영이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한 경자의 색은 흰색과 검은색 사이, 말 그대로 쥐색이었다. 

쥐한테 이름을 붙인 너도 너다. 학과 사무실에 말해야지. 조영희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말했다. 그건 안 돼. 박나영은 단호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박나영은 우연히 집필실에 들어온 매미를 누군가 발로 밟아 죽였던 장면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수년이나 되는 시간을 땅 속에서 보낸 매미가 고작 이 주 정도 땅 위에 머무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는 사람들, 자신의 영역에 침범하는 것이라면 무조건 없애고 보는 사람들의 모습에 박나영은 환멸을 느꼈다. 그날 박나영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안 돼. 박나영은 속으로 다시 한번 외쳤다. 박나영은 연구실 구석에 과자나 빵 부스러기 등을 조금씩 흘려놓았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지금 쥐가 문제가 아니라니까. 유언장 어떻게 할 거야. 변호사 구해야지. 박나영이 경자의 색을 기억해 내려고 애쓰는 틈을 타 조영희는 박나영을 한번 흘기고는 화제를 돌렸다. 그래야겠지? 박나영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독한 년, 아들 하나 낳고 이 날만 기다린 거지. 나쁜 년이 따로 없네. 둘째가 엄마 뱃속에서 욕부터 배우겠다. 허공에 젓가락질을 하며 울분을 내쏟는 조영희를 향해 박나영이 물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조영희의 둘째는 아들이라고 했다. 

조영희는 무색한 듯 핸드폰을 들더니 전화번호 하나를 문자로 보냈다. 아는 언니 남편이라고 했다. 사무실 오픈한 지는 몇 년 안 됐는데 사람이 싹싹하고 성실해. 조영희는 늘 도움을 주지 못해 안달 난 사람처럼 굴었고 그런 조영희의 도움을 받아들이는 것은 조영희와의 관계에서 박나영이 맡은 역할이었다. 식당을 나와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도 조영희는 계속해서 유언장에 열을 올렸다. 화가 난다기보다는 그냥 의아해. 조영희의 울분 섞인 목소리가 잦아들 즈음 박나영이 말했다. 자신의 이름이 유언장 어디에도 없는 것이 자식을 성별에 따라 나눈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고. 자신에게는 자라는 동안 그런 일을 겪은 기억이 없다고.

-너는 원래 기억 잘 못하잖아.

평소에도 자주 하는, 타박과 서운함이 섞인 말이었다. 그렇다 해도 한 집에서 이십 년을 살았는데 그 정도는 자신도 가늠할 수 있다고, 항변하듯 응수하며 박나영은 말 끝을 흐렸다. 실제로 바로 어제 치른 장례마저도 벌써 흐릿해지고 있었다. 박나영의 머릿속을 꿰뚫은 것처럼 그럴 줄 알았다며 조영희가 박나영의 표정을 보더니 혀를 찼다. 

아까 준 연락처 잘 저장해 놔. 연락 꼭 해보고. 헤어지기 전 조영희는 못 미더운 듯 당부하며 그놈의 공부 언제까지 할 거냐고 한마디 얹었다. 우리 아파트에 나이 좀 있는 여자 하나가 혼자 사는데, 어디 교수라나 봐. 옷도 세련되게 입고 예쁘장하게 생겼는데 그럼 뭐해. 그래봤자 혼자 사니까 입에 오르내리기 딱 좋지. 조영희는 동네 모든 여자를 언니라고 불렀는데, 혼자 산다는 그 여자만큼은 그냥 여자라고 불렀다. 구시대적이라고 욕할 거 없어. 원래 그런거야. 그러니까 연락 꼭 하라고. 조영희가 말하는 동안 박나영은 경자를 떠올리고 있었다. 경자도 혼자일까? 올해 아홉수라 조심해야 한다고, 용한 점집이 있다며 언제 한번 시간을 맞춰보자는 조영희의 제안에 박나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두 사람이 서로에게 호의를 베푸는 방식이었다.

조영희가 차를 타고 사라지자 박나영은 김여사의 집으로 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김여사로부터 온 부재중 전화 두 통이 핸드폰 화면에 찍혀 있었다. 김여사의 집은 박나영의 자취방에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곳에 위치한 조그마한 아파트였다. 김여사가 들어와 살라며 채근하곤 할 때마다 박나영은 수업이나 논문 핑계를 대며 자취방을 고수해온 터였다. 

김여사의 집 현관에 들어서기 전에 숨을 참는 건 박나영의 버릇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조금씩 숨을 들이마시며 혼자 사는 나이든 여자 집에서 나는 냄새가 아직 풍기지 않음에 안도했다. 간혹 시큼한 냄새가 날 때도 있었지만 그건 김여사가 거실 바닥을 식초로 닦아서 나는 냄새였다. 김여사는 그래야 깨끗이 닦인다며 틈틈이 식초로 바닥을 문질러댔다. 이번에 김여사의 현관문을 열었을 때도 희미하게 남아 있는 시큼한 냄새에 박나영의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김여사는 박나영을 보자마자 박사장에 대한 욕을 쏟아냈다. 씨발 새끼, 돈 받고 구경시킬 종자, 뒈지는 것도 아까운 쌍놈의 자식. 욕은 김여사가 건강하다는 증거였으므로 박나영은 욕이 잦아들 때까지 조용히 욕을 음미했다. 아무리 그래도 죽은 사람 두고 그렇게 말해도 되는 거야? 박나영이 부츠의 지퍼를 내리며 말했다. 김여사는 생각할수록 분하다고, 사진도 다 태워버려야 한다며 오래된 사진첩 세 개를 작은 방에서 꺼내와 거실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박나영은 검은색 패딩을 벗어 소파에 놓아두고 거실 바닥에 앉아 널브러져 있는 사진첩 중 하나를 펼쳐 보았다. 자기 앞에 놓인 일들을 알지 못하는 어린 여자 아이가 모래사장의 흙 속에 손을 넣고 해맑게 웃고 있었다. 혼자, 혹은 사진 속에만 존재하는 사람들과 함께. 박나영은 사진첩을 몇 장 뒤로 넘기다가 박사장과 둘이서만 찍힌 사진 한 장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사진 하단에는 연도는 없이 월 일만 찍혀 있었다. 07. 24. 

-근데 엄마, 정말 아빠가 아들 아들 했었어?

김여사는 어이 없다는 듯 박나영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그래. 

내일 오후 두 시께 들르라는 이교수의 메일을 받은 박나영은 저녁 먹고 가라는 김여사의 만류를 다음에, 라는 짤막한 대답으로 뿌리치고 집을 나섰다. 뒤통수로 김여사의 서운한 마음이 전해져 왔지만 밥을 먹고 나면, 자고 가라고, 그 다음엔 집에 들어와 살라는 채근이 이어질 것이 분명했기에 여지를 남기지 않는 것이 박나영이 택한 전략이었다. 게다가 내일 이교수를 만나러 갈 때 빈 손으로 가지 않으려면 논문을 정리해야 했다. 박나영이 이교수의 오피스를 찾아갈 때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하는 행동이었다. 그렇게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려는 듯. 

아직 퇴근 시간 전이라 학교로 향하는 버스에는 박나영을 제외하고 예닐곱 정도의 승객들이 서로 적당한 거리에 떨어져 앉아 있었다. 해가 떨어질 시간이 아닌데도 하늘은 어둡고 차창으로 보이는 풍경은 스산했다. 박나영은 창가에서 전해져 오는 한기를 한 쪽 어깨로 느끼며 조금 전 김여사의 집에서 가져온 사진 한 장을 주머니에서 꺼내 들었다. 사진 속 박사장은 박나영을 무릎에 앉힌 채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화덕 앞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대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박나영은 소매가 없는 붉은색 원피스를 입고선 박사장의 목을 팔로 두른 채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박사장을 닮은 하얀 이가 입술 사이로 보였다. 박나영의 눈 앞이 흐려지고 사진은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작품처럼 뭉개진 이미지로 변했다. 

집필실은 비어 있었고 창문으로 붉은 석양빛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박나영은 이교수가 알려주었던 레퍼런스들과 추가로 읽은 논문을 정리한 후 크루거의 작품을 떠올려보려 했으나 오래된 사진처럼 흐릿한 이미지만 어른거려 구글링을 해야만 했다. 

총알을 맞고 여러 갈래로 금이 간 거울에 비친 조각난 여자의 얼굴 위로 ‘You are not yourself’라는 문구가 조잡하게 오려 붙여져 있었다. 작품에 사용된 색이라곤 검은색과 흰색이 전부였다. 노트북 화면에 띄워진 작품을 보며 박나영은 이제껏 정리한 내용을 상기하려 애썼다. 조각난 여자의 이미지는... 사회에서 파편적 여자의 존재... 충돌하는 역할들... 주체성에 대한 요구... 자아에 대한 인식... 작품의 이미지처럼 부서진 글자들만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박나영은 난잡하게 흩어져 있는 글자들을 하나로 엮어줄 무언가가 부족함을 느꼈다. 처음부터 빠져 있었던 가장 핵심적인 무엇. 박나영은 노트북 한가운데 떠 있는 크루거의 작품에서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그 무엇을 찾아보려는 듯 한참 동안 화면을 응시한 채 앉아 있었다.

눈이 뻐근해질 즈음 핸드폰의 짧은 알림음이 귀를 잡아끌었다. 노트북에서 시선을 뗀 박나영은 의자에 등을 붙인 채 바퀴를 뒤로 밀며 핸드폰 대화창을 열었다. 

나영아 전화 꼭 해. 엄마를 생각해서라도. 

조영희였다. 박나영은 살면서 변호사를 만나게 되리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유산을 받아내기 위한 것이라니. 박나영은 선뜻 내키지 않았다. 오수진의 말마따나 자신은 상복도 안 입지 않았던가. 박나영은 근 십여 년을 남남처럼 살았던 사람의 것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내가 부친을 부친으로 생각하지 않은 만큼 부친 역시 나를 자식으로 생각하지 않은 것뿐이지 않나. 박나영은 어쩐지 자신이 염치없는 인간처럼 느껴졌다. 딸이라서가 아니라 단지 자식으로 여기지 않아서였으리라고, 박나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다면 박사장의 유언은 이해 못할 것은 아니었다. 박나영은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다시 의자를 앞으로 당기려던 박나영은 너울거리는 그림자에 책상 옆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경자인가 했던 박나영은 그것이 자신의 그림자인 것을 알고 기운이 조금 빠졌다. 연구실 구석에 자신이 흘려놓은 부스러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서운함이 밀려왔다. 영영 사라져 버린 걸까. 그러다 문득 박나영은 이 영역을 침범한 것은 경자가 아니라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나영은 나지막한 소리로 불러보았다. 

경자야. 

집필실은 그야말로 쥐 죽은 듯 고요했다.

*

다음날 오전 박나영이 집필실 문을 열려는데, 학과 조교가 뛰어왔다. 마침 나오셨네요, 가볍게 숨을 몰아쉬던 조교는 호흡을 가다듬고는 손에 들고 있던 검정 비닐봉지를 박나영에게 내밀었다. 

-쥐약이에요.

박나영의 표정에서 물음표를 감지한 조교는 어제 이교수의 오피스에 쥐가 나타나서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고, 그래서 건물 전체에 쥐약을 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고 숨 쉴 틈도 없이 설명을 이어갔다. 아침부터 쥐약을 사러 다녀와야 했다며, 푸념 섞인 듯한 말투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쥐약을 배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교수의 오피스는 박나영의 집필실과 같은 건물의 맨 위층에 있었다. 이런 건 원래 전문 회사에 맡겨야 하는 건데, 쥐를 본 건 이번이 처음이라 쥐약으로 어떻게 해보려는 건가 봐요. 그런데 선생님도 혹시 쥐 본 적 있으세요? 박나영은 봉투를 손에 든 채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바로 쥐약 좀 놓아달라고 당부한 뒤 조교는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집필실에 들어온 박나영은 조교에게서 건네받았던 자세 그대로 한쪽 손을 앞으로 내민 채 서 있었다. 손 끝에 걸린 검정 비닐봉지가 조금씩 흔들리면서 희미하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교수의 오피스에 나타났다던 쥐 소식을 듣는 동안 박나영의 머리 속에는 자연스레 경자가 떠올랐다. 한동안 그대로 서 있던 박나영은 천천히 비닐 봉지를 열어 쥐약을 꺼냈다. 원통형 플라스틱 통에는 쥐약을 먹은 쥐가 모세혈관이 터지고, 혈액이 응고되어 말라 죽는다는 설명이 굵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일그러진 미간 아래로 움직이던 박나영의 눈동자가 마지막 문장에서 멈추었다. 처리가 간편합니다. 

박나영은 플라스틱 통을 들고 집필실 구석으로 가 쪼그려 앉았다. 어제 저녁 뿌려 두었던 빵 부스러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빵 부스러기 위에 옅은 선홍색 알갱이 모양의 쥐약 몇 알을 떨어뜨렸다. 박나영의 코끝을 타고 투명한 액체 한 방울이 바닥에 놓인 알갱이 하나로 떨어져 옅은 선홍색을 붉은색으로 물들였다. 조금 전 보았던 문구가 박나영의 온몸을 할퀴며 파고들었다. 처리가 간편합니다. 구부러진 박나영의 등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가 한동안 흔들렸다.

그날 오후 박나영이 이교수의 오피스를 찾았을 때, 처음 보는 얼굴이 이교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서글서글한 눈매를 가진 젊은 남자였다. 어딘가 낯이 익었지만 단박 떠오르지 않았다. 교내 카페 로고가 박힌 종이컵이 이교수와 남자 앞에 놓여 있었으므로 두 사람이 함께 점심을 했으리라 박나영은 짐작했다. 박나영은 이교수와 단둘이 점심을 먹은 적도, 오피스 밖에서 만난 적도 없었다. 이교수는 늘 점심이 지난 시각에 박나영을 오피스로 불렀다. 박나영이 오피스로 들어서자 남자는 일어나 나가려는 제스처를 취했지만 이교수가 그냥 앉아 있으라는 손짓을 했다. 이교수는 박나영에게도 남자 옆에 앉으라고 했다. 박선생이 이번 학기에 교양 수업 하나 했던 거 과목명이 뭐였지? 명화로 보는 서양 현대미술사입니다, 낯선 남자 앞에서 이교수의 질문에 대답하는 동안 알 수 없는 모욕감이 밀려왔다. 

들으니까 이번 수업에 대해 말들이 좀 있었나 보던데, 요즘 그런 쪽에 민감한 애들이 있는 건 알고 있지. 이교수의 말에 박나영은 한 학생을 떠올렸다. 빈 분리파에 대한 강의를 할 때였다. 여학생 하나가 손을 들더니 공격적인 어투로 질문을 던졌다. 슐레나 클림트는 여성 편력이 심한 사람들 아니었나요? 박나영은 처음에 그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다. 그저 작품과 예술가의 사적인 삶을 분리해서 작품을 판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이들의 작품들은 당시로선 매우 신선한, 전통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졌다고 열심히 설명했다. 박나영은 자신의 대답에 수업 내내 찡그린 미간으로 응수했던 여학생의 모습을 쉽게 떨쳐낼 수 없었다. 그날 수업 이후로도 박나영은 자신이 무슨 대답을 했더라면 그 학생이 만족했을지 한참 고민했었다. 그러다 박나영은 그것이 질문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경고. 그리고 박나영은 지금 이교수에게서 그 경고장을 전해 받고 있는 것이었다. 

그건 그렇고, 라며 이교수는 말을 이었다. 내년부터 강사법 시행 되는 거, 박선생도 알지? 이교수의 말에 남자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교수는 강사법 때문에 학과에서도 골치를 썩고 있다며 짜증 섞인 투로 몇 마디 하고 나서야 남자를 박나영에게 소개했다. 학부 시절 후배로 영국에서도 같은 지도교수 아래서 수학했다는 그는 박사를 마치고 한 달 전 귀국했다고 했다. 안녕하세요, 윤후라고 합니다. 후라는 이름이 박나영의 머릿속 한 귀퉁이를 건드렸다. 몇 달 전에 동기가 요즘 뜨고 있는 컨텐츠라며 ‘Who’s Hu’라는 채널의 링크를 보내준 적이 있었다. 영국 BBC 예술 다큐 메이킹 작업에 참여한 적이 있다는 그는 자신의 경험을 적당히 버무려 현대 미술가, 유명 갤러리 등을 영상으로 소개해주는 활동을 하고 있었다. 박나영은 그가 테이트 모던 갤러리를 방문해서 찍은 십여 분 정도의 짧은 영상을 본 적 있었다. 거기엔 크루거의 작품도 들어 있었다. 제목이 뭐였더라? 박나영은 작품명이 기억나지 않았다. 박나영이 기억하는 건 영상 속에서 하늘색 스트라이프 셔츠를 입고 머리를 말끔하게 뒤로 넘긴 후가 세련된 영국식 발음을 섞어가며 말하는 모습이었다. 

윤후는 이런저런 일을 하며 영국에서 운 좋게 강의도 했었다며 특유의 눈웃음을 지었다. 타고 나는 것인지 만들어지는 것인지 박나영이 영상을 보며 궁금해했던 그 눈웃음이었다. 이교수는 그를 윤선생이라 불렀고 그는 이교수를 선배님이라고 불렀다. 선배님 때문에 한국에 들어왔다고, 그러니까 책임져야 한다고. 재밌는 친구지? 이교수는 동의를 구하듯 박나영에게 말을 던졌다. 박나영은 입 끝을 위로 당기려 애쓰며 네, 라고 대답했다. 이교수는 목을 한번 가다듬고는 말투를 고쳐 말했다. 강사법이 시행되면 지금처럼 아무나 쓸 수가 없어. 윤후에게 강의 자료를 넘겨주라는 이교수의 말이 귓가를 스치는 동안에도 쥐가 난 것만 같은 통증에 박나영의 가슴이 조여들었다. 아버지의 유언장을 봤을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이름의 부재, 그리고 아무나.

이교수의 말은 그게 전부였다. 이교수와 윤후 사이에 미소와 눈빛이 오갔고, 그것이 모든 것을 설명해 주고 있음을 박나영은 알고 있었다. 알겠다는 박나영에게 이교수는 바쁜 사람 너무 잡아 놓은 거 같다며 나가보라고 했다. 일어서서 인사를 하는 박나영을 바라보며 윤후, 그가 말했다. 괜히 제가 미안해지네요. 잘 부탁합니다. 그의 예의 바른 상냥함에 수치심이 일어 박나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문 손잡이를 돌리던 박나영은 윤후의 영상에서 보았던 크루거의 작품명을 기억해냈다. 박나영은 이교수와 윤후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거 맞죠? Who owns what?

이교수와 윤후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문을 열고 나가는 박나영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교수의 오피스에서 나와 핸드폰을 보니 모르는 번호로부터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박사장의 글씨체로 쓰여진 수첩의 단면이 찍힌 사진이었다.

박나영 백만 원. 2017년 8월 28일. 

한쪽 귀퉁이로 보이는 수첩의 색으로 보아 오수진이 유언장을 들이밀던 날 펼쳐 보았던 수첩인 것 같았다. 아들이라도 남의 집처럼 오냐오냐하면서 키우진 않았다고, 그런데 딸인 너한테는 백만 원이나 따로 챙겨 주지 않았느냐고, 사진 아래로 장문의 문자가 적혀 있었다. 그러니까 유언장의 내용은 합당한 것이라고.

박나영은 건물을 빠져나와 듬성한 머리카락처럼 줄기가 늘어진 느티나무 아래 벤치에 앉았다. 사진을 보내온 전화번호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지만 받지 않았다. 박나영은 전화가 끊기기를 기다렸다가 조영희가 보내주었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이 짧게 들린 후 단정한 목소리의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박나영은 잠시 뜸을 들인 후 운을 뗐다. 유산 분쟁 소송 때문에 전화 드렸어요. 어쩌다 한번 날린 잽에 스스로도 놀란 사춘기 소년처럼 박나영은 자신의 입에서 나온 단어들에 흠칫했다. 아, 혹시 박나영씨 되시나요? 그는 조영희로부터 상황을 대충 들었다며 박나영을 알은 체 했다. 그러고선 준비할 서류와 사무실 주소를 문자로 보내줄 테니 내일이라도 들르라고 일렀다. 앞으로 그쪽과의 연락은 자기가 할 테니 전화가 와도 받을 필요 없다는 그의 말에 박나영의 얼어붙었던 코끝이 뜨끈해졌다. 소송에 들어가는 비용을 알 수 있느냐는 박나영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그는 대략적인 비용을 설명해 주고선 덧붙였다. 계약서 작성 후 착수금으로 백만 원만 선지불 하시면 됩니다. 원래 이백만 원인데 조영희가 특별히 부탁한 분이니 백만 원으로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전화를 끊기 전 그는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목소리를 낮추어 단호하게 말했다.

-박나영씨, 마음 단단히 먹으세요. 그 사람들 아주 나쁜 사람들입니다.

박나영은 그 사람들이 정확히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감사합니다, 라고 짧게 인사한 후 전화를 끊었다. 박사장, 오수진, 오수진의 아들, 작은 아버지, 그 자리에 있던 친척들에 이어 이교수, 그리고 윤후의 얼굴이 박나영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사람들은 아주 나쁜 사람들인 걸까? 박나영은 오수진의 전화를 받지 않고 변호사와 통화를 한 자신이 아주 나쁜 사람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윤후의 친절함에 응하지 않고, 조영희에게 답장을 하지 않고, 김여사의 집에 들어가 살지 않고, 장례식장에서 상복을 입지 않고, 슐레와 클림트를 옹호하고, 스무 살 때 집을 나온 자신이 나쁜 사람일 수도 있다고. 그러니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는 그의 말은 박나영에게 소중한 것이었다. 정말 나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만 하니까.

집에 돌아가는 길에 박나영은 동네 마트에서 딸기 한 상자를 사와 앉은 자리에서 먹어 치웠다. 평소에는 비싸서 쳐다만 보던 딸기였다. 다음 날도 딸기 한 상자를 더 사서 한 번에 해치우고선 해가 기울 때까지 내리 잤다. 이틀 후 자취방을 나온 박나영은 변호사 사무실에 가기 전에 학교에 들렀다. 학생들의 성적을 입력하고 집필실 자리를 정리해 놓을 참이었다. 건물에 들어서면서 박나영은 김여사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저녁은 가서 먹을게요. 박나영이 집필실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청소부 두 명이 청소도구가 들어 있는 조그마한 손수레를 하나씩 끌고 나타났다. 아침에 사층 복도에서 쓰레기통을 비우려는데 글쎄 구석에 쥐가 있지 뭐야. 쥐라는 말에 박나영의 가슴이 덜커덕 내려앉았다. 요즘도 쥐가 있어? 그것도 이런 건물에? 너무 징그럽다. 내 말이, 이 건물 지은 지 몇 년 되지도 않았잖아? 자기 너무 놀랐겠다,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어떻게 하고 말고가 있나, 눈 딱 감고 집게로 집어서 쓰레기봉투에 넣었지. 무슨 병 옮기고 그런 건 아니겠지? 에이, 한 번씩 쓰레기통 비울 때 보면 그보다 더한 것들도 많잖아. 배운 사람들이 더하더라니까. 박나영은 두 사람이 마지막에 목소리를 낮춘 것이 자신 때문이라 여겼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청소부들이 먼저 엘리베이터에 탔다. 두 사람에게 딸려 들어간 손수레 두 개가 엘리베이터 안을 가득 채웠다. 엘리베이터 문 밖에 서서 먼저 올라가라는 박나영에게 아주머니들은 합창이라도 하듯 미안해요, 라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박나영은 괜찮아요, 라고 답했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엘리베이터 문은 닫혀 버렸다. 박나영은 다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그들이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사층이면 집필실이 있는 곳이었다. 박나영은 쥐가 무슨 색이었는지 물어보지 못했던 걸 후회했다. 쥐가 쥐색이지 뭐야. 물어봤더라도 그런 답변이 돌아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얼마 전 인터넷에서 보았던 작품이 떠올랐다. 박제한 쥐에게 천사처럼 새하얀 날개를 붙인 작품이었다. 새하얀 날개만큼이나 새하얀 쥐였다. 박나영은 경자가 꼭 그런 색이었으리라 상상했다. 쥐색이 아닌 새하얀 쥐. 천사 같은 날개가 달린 경자. 그러니까 이 모든 건 경자를 위해서라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박나영은 서랍에서 꺼내온 백만 원이 든 가방을 꼭 움켜쥐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면서 박나영의 그림자를 삼켰다.

김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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