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에세이] 안지현 인문대 교수ㆍ영어영문학과

시카고의 겨울은 유난히 매섭다. 시카고에 살아본 사람들이나 겨울에 시카고를 방문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이런 시카고의 계절적 특징을 늘 대화로 삼을 정도다. 4년 동안 시카고에서 공부하면서 나는 아마도 그 때까지 내 인생의 가장 추운 겨울을 그 곳에서 보냈던 것 같다.

박사 과정 2년 반을 마친 후 논문 자격시험이라는 큰 짐을 덜고 나면 날아갈 듯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험을 통과한 직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몸의 세포를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을 수반한 이상한 병에 걸려 누워 있어야만 했다. 그 해 1월 시카고에는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렸고 추웠다. 사실은 실제로 추웠는지 아니면 마음이 얼어붙은 듯해서 춥게 느껴졌는지는 지금도 헷갈린다. 하지만 기억에 또렷이 남는 것은 책상과 침대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썰렁한 방에 갇혀 거의 하루 종일 누워있던 시간들이다. 지긋지긋해진 전공서적은 근처에도 가기 싫어 예전에 즐겨 읽었던 책들을 다시 꺼내어 읽기 시작했는데 그 중 지금 기억에 남는 책이 시몬느 베이유(Simone Weil)의 『신을 기다리며』(Waiting for God)이다.

내 기억 속의 베이유는 1930년대 프랑스 노동운동에 참여한 바 있고 스페인 내란 때 공화제를 지지했던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좌파 지식인이었다. 베이유가 20세기 지성사에 독특한 위치를 점하게 된 이유는 그 이후 강렬한 신비주의적 체험을 통해 자신이 그토록 완강하게 거부해왔던 신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러한 체험을 고도로 응축된 독특하고도 아름다운 문체로 남겼기 때문일 것이다. 사상가이자 행동가인 베이유를 대학시절에 탐독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그녀가 평생 ‘고통’에 집착하였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어렸을 때도 참전한 군인들의 고통을 공유하기 위해 설탕을 먹지 않았고 노동운동을 할 때는 노동자들의 고통을 공유하기 위해 몸도 몹시 허약하고 평생 동안 지독한 편두통에 시달렸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노동자들과 동일한 조건에서 일하였다. 그녀의 철학적 근간은 고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정신적 고통뿐 아니라 견딜 수 없을 만큼 극심한 육체적 고통을 포괄한 개념이다.

이런 점에서 그녀는 고통(suffering)과 고뇌(affliction)를 구별하며, 극심한 고통을 겪어 본 사람만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며 신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한다. 「신의 사랑과 고뇌」에서 그녀는 “어떤 인생을 사로잡아 송두리째 뿌리뽑는, 한 사건이 사회적, 심리적 그리고 육체적으로 그 인생을 직[]간접적으로 공격하지 않는 한 그것을 진정한 고뇌라 할 수 없다”라고 고백한다. 그 때까지 베이유의 육체적 고통을 정신적 갈등 혹은 고통 정도로만 이해하고 고통의 의미를 추상적으로만 받아들였던 나는, 고통을 통한 공감과 타인의 고통의 이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얻게 되었다. 아니,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미국 흑인문학을 전공한 나는 논문 자격시험을 준비하면서 흑인 역사의 고통과 고난 그리고 그 고통의 보편적 의미에 대해 오랜 시간 동안 사유하고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간다는 기쁨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베이유를 새롭게 읽으면서 내가 습득한 지식은 과연 어떠한 “앎”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통해 몸으로 체득되지 않은 앎은 그 흔적을 깊이 남기지 않는다는 깨달음은 아직까지도 내 몸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베이유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교육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앎의 의미를 가르치는 것”이라는 말을 남겼는데, 내겐 가르치는 일 이전에 배우는 일조차 너무나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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