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문을 나서며 | 졸업을 맞은 학생들의 이야기

이은호(서어서문학과 졸업)
이은호(서어서문학과 졸업)

학부생 노릇을 꽤 오래 했다. 그동안 학교의 많은 것이 바뀌었다. 떠나가는 길에 하나 말해보려 한다.

먼 옛날 1, 2학년 때 중앙도서관에서 살았다. 진작 졸업한 한 동기는 ‘중도 마스터’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내게 주었다. 마스터의 자리는 열람실이 아닌 자료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시, 희곡 등만 읽었다. 그러다 어둑해지고 저녁이 가면 찾아드는 소리가 있었다. 아마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학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제 하루를 마감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오늘 도서관을 이용하시면서 불편한 점은 없으셨는지요. 학생 여러분이 거둔 수확이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하게 사용되기를 기대합니다.”

클로징 멘트는 도서관에 밤이 왔음을 알리며, 학생들에게 그만 내일을 기약할 것을 권했다. 그런데 멘트는 언젠가부터 조금 바뀌었다. 들어보시길. 이전 멘트가 사회에 대한 기여와 공공성을 말했다면, 지금의 멘트는 학생 여러분이 각자의 삶에 충실할 것을 제안한다. 전자는 공동체를, 후자는 개인을 언급한다. 나라를, 공동체를 말하던 시절이 있었다. 개인과 소확행을 말하는 날들이 있다. 거울처럼 다르지만 닮아 있는 두 시대에서 결국은 개별 존재들이 갈려 나갔다. 앞으로는 그렇지 않을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어느 한쪽만 강조해서는 어렵다는 사실. 공동체가 사라진 도서관 멘트가 못내 아쉬우면서도 원상복구를 말하기 어려운 이유다.

어쩌면 한국 사회의 대학이야말로 둘 사이를 모색하는 데 적합한 장소 중 하나일지 모른다. 개인은 공동체를 만나고 집단은 개별성과 충돌하는 곳. 책 속에서, 또 교실 밖에서 정치니 민주니 하는 것들을 새로이 알 수 있는 간이역. 하지만 대학 역시 개인을 말하는 사회에서 마냥 자유로울 수는 없다. 어떤 방법이 가능할까? 저서 『정치적 감정』에서 마사 누스바움은 관심의 원(circle of concern) 개념을 언급한다. “우리는 완전히 낯선 사람들보다는 우리가 걱정하는 사람들을 위해 슬퍼한다. 우리는 화성에 일어난 지진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과 우리를 염려하는 사람들을 위협하는 피해를 두려워한다. 우리 내면의 깊은 감정을 뒤흔드는 것은 내가 머릿속에 그리는 소중한 삶의 영역 안에 있는 존재들이다.” 결국 원의 크기를 늘리자는 것. 물론 한 번에 모든 이들을 포함할 만큼 키울 수는 없다. 찬찬히 공부하고 경험하면서, 나와 다른 생각과 관심을 가진 이들을 만나면서 원을 키워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것은 관심이나 생각만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다. 관심을 나타내는 영어 단어 ‘concern’의 다른 뜻에 ‘이해관계’가 있듯, 우리에게 무엇보다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피해와 이익이다. (누스바움의 말을 다시 읽어보라) 그것이 물리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역사적인 독일의 1976년 ‘보이텔스바흐 합의 3원칙’이 이해관계와 교육을 결부시킨 이유겠다. 결국 우리는 나와 타인의 이해관계에 대해 배우고 결정하고 책임질 때 관심을 가지는 것은 아닐까. 실은 도서관 멘트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마무리하며, 앞으로 도서관 멘트를 들으며 수확을 거둘 학생들께 부탁 하나 드리고 싶다. 마침내 여러분이 사회와 개인이 존재를 억압하지 않는 날을 맞거든, 관용하는 마음으로 앞서 간 승객들을 생각해주길. (베르톨트 브레히트, 『후손들에게』 오마주) 또한 학교는 학생들의 이해관계와 직결된 재경위원회와 기획위원회에 학생들을 참관시켜 주길 바랍니다. 이사회까지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민주주의고 교육이고 희망입니다. 서울대가 앞으로도 역사의 갈피마다 슬기롭기를, 내일의 뼈 있는 자의 탄생을 기원하며 글을 마친다.

이은호(서어서문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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