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싫어하시겠지만 삼촌과의 일화를 풀어본다. 수습을 뗐을 적이니 재작년이려나, 우연히 기숙사 식당에서 마주쳐 겸상하게 된 삼촌이 진로 계획을 물었다. 기자라고 답했다. 삼촌은 좋은 학교 나와서 왜 ‘기레기’가 되려고 하냐는 식으로 운을 뗀 다음, 공무원이 더 낫지 않겠냐고 했다. 더 큰 스트레스와 귀찮음을 피하고자 “생각해 볼게요”라고 말하며 웃어넘겼다. 친척끼리 으레 주고받는 오지랖이라고 치부하고 잊어버릴 법도 하다. 하지만 이 짧은 문답이 아직도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걸 보면 마음 깊은 곳에 상당히 불쾌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듯하다.

 왜 식사 시작 5분 만에 꿈을 부정당해야 했을까. 짐작건대 삼촌은 안정적인 직업을 추천하기보다는 기자라는 직업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기자가 되고 싶다는 귀여운 조카를 앞에 두고 기레기라는 멸칭을 사용했을 리가. 이윽고 왜 사람들은 기자를 싫어할까 자문하기에 이르렀다.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자답이 쏟아져 나왔다. 자극적인 기사 제목, 미흡한 사실 검증, 잦은 오보와 그에 반해 소극적인 정정 보도, 정·재계와의 유착 등 다 나열하기도 힘들다. 기레기라는 표현을 자초한 게 언론이라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인격자이신 삼촌이 대뜸 반감을 보인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그래도 분했는지 기레기가 어떻게 쓰이는지 찾아봤다. 생각과 달리 잘못 작성된 기사보다 정치 기사에 기레기라는 댓글이 더 많았다. 정부를 옹호해도 기레기, 비판해도 기레기였다. 비슷한 시기에 전북대 강준만 교수님이 「한겨레」에 칼럼을 기고했다. 지금의 ‘기레기 사용법’은 그게 전혀 아니더군요. 자신의 생각과 다른 기사 내용에 대해 무조건 기레기라고 욕하는 게 법칙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 당신은 모든 기자와 언론을 기레기라고 하진 않을 겁니다. 당신이 ‘우리 시대의 진정한 의인’이라고 여기는 논객 또는 선동가들과 그들의 주장이 발설되는 매체엔 뜨거운 지지를 보낼 겁니다. 

 꽤 논란이 됐다. ‘국민 탓하는 거냐’ ‘이래서 기레기 소리를 듣는 거다’라는 투의 댓글이 우후죽순 달렸다. 이런 댓글들을 보며 역설적으로 이 칼럼에 더 설득됐다. 자기 생각과 다르면 기레기가 된다는 칼럼의 내용이 그대로 재현됐다. 일련의 사건을 통해 기레기라는 표현이 언론의 반성과 자아비판을 촉구하는 것에서 진영논리와 혐오를 드러내는 것으로 변했다고 느꼈다. 그렇게 모든 기자는 기레기가 됐다.

 어쩌다 기자를 꿈꿨는지 되짚어본다. 몇 년 전 펜이 사회를 바꾸는 걸 봤다. 그런 펜을 들고 싶었다. 펜을 먼저 든 한 선배가 기레기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아프면 기레기가 아니고 아프지 않으면 기레기란다. 아프냐고 물으니 제법 아파서 퇴직을 고려할 정도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기레기라는 표현의 오남용은 결과적으로 무감각한 ‘기레기’로 가득한 언론을 만드는 건 아닐까. 기자들과 언론사들을 두둔할 생각은 없다. 치열한 노력과 자성이 필요하다. 다만 별생각 없이 내뱉는 기레기라는 말에 상처받을 기자 하나둘쯤은 있다는 점을 기억해줬으면 한다. 세상에 그 자체로 욕먹어도 되는 직업이 없다는 것도. 사회를 바꿀 펜을 만드는 건 비하와 경멸이 아니라 건설적인 비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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