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이벤트 호라이즌(Event Horizon)〉이라는 공포영화를 본 적이 있다. 조난당한 우주선 ‘이벤트 호라이즌’ 호를 구출하기 위해 일단의 대원들이 파견되는데, 그 과정에서 이들은 각자의 트라우마(trauma)에 사로잡혀 조금씩 미쳐가게 된다. 이어 조난당한 승무원들이 형언할 수 없는 끔찍한 광경에 처한 모습과 함께, 정신을 완전히 놓아버린 함장이 “그대 자신을 지옥에서 구해내시오(Libera te tutemet ex inferis)”라고 절규하는 장면이 연출된다. 이들 역시 과거의 트라우마에 휩싸여 생지옥에 갇혀버렸던 것이다.

‘이벤트 호라이즌’, 즉 ‘사건의 지평선’은 본디 블랙홀(black hole)의 특이점(singularity)에 너무 가까운 나머지 초속 30만 ㎞의 빛조차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경계를 일컫는다. 빛을 포함한 모든 물질이 이 ‘사건의 지평선’으로 들어가면 나올 수도 없고, 외부에서 관측할 수도 없는 상태가 된다. 이벤트 호라이즌은 이 천문학 용어를 은유하여, 치유받지 못한 과거의 아픈 기억이 인간의 영혼을 파멸시킬 수 있음을 오싹하게 보여줬다.

최근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사건의 지평선’에 들어가 고통받고 있는 이들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고 있다. 연초부터 불거진 학교 폭력 논란은 유명 배구·야구·축구선수들에 대한 폭로로 확산되면서 연예계와 체육계 전반을 강타하는 중이다. 한편 세월호 참사 당시 국가기관 인사들에 대한 무죄 선고 및 무혐의 처분에 유족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있으며, 하버드대 교수의 논문으로 야기된 위안부 문제 왜곡 논란은 조야(朝野)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사건의 피해자들이 겪는 괴로움은 당사자가 아닌 이상 알 수 없을 고통일 터다. 다만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박탈당했던 경험, 소중한 이들을 무력하게 떠나보내야 했던 좌절감, 끝없는 자책과 회한의 심정이 시공을 가리지 않고 피해자들을 엄습해, 매 순간이 그때마냥 느껴지는 ‘무간지옥’ 같지 않을까 감히 짐작해볼 뿐이다. 그 아픔이 인간의 영혼을 얼마나 잠식하고 파탄에 이르게 하는지 상상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상상하기 어려운 것을 상상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치유의 첫발을 내딛을 수 있다. ‘사건의 지평선’에 갇힌 피해자들의 아픔이 얼마나 심대한지, 그 상처를 아물게 하려면 어떤 조치가 필요하고 책임져야 할 이들은 어떻게 처신하면 될지 직시하는 것이야말로 문제 해결의 단초일 것이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점은 과거의 아픔으로 괴로워하는 이들을 ‘사건의 지평선’ 내에서 이해하려는 노력 못지않게 이들을 그 지평에서 건져 올리려는 시도 역시 중요하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의 고통에 공감하며 책임져야 할 이들의 사죄와 합당한 배상을 요구하는 일은 마땅히 계속돼야 하지만, 이들의 트라우마를 불필요하게 들춰내고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것은 오히려 상처를 덧나게 하는 처사다. 특히 피해자 보호의 미명 하에 ‘사건의 지평선’을 하나의 성역(聖域)으로 둔갑시켜 이들을 그 지평에 계속 머무르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경계해야 할 일이다.

진정한 치유는 피해자들의 억눌린 마음을 최대한 해소해주는 한편 그들이 더는 과거의 아픔에 사로잡히지 않고 일상을 원만히 회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괴로운 기억 속에 몸부림치는 이들이 ‘사건의 지평선’을 무사히 벗어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고용준 간사

삽화: 김윤영 기자 kooki1026@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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