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에는 무엇을 써야 할까. 나는 수첩이 없는데. 취재수첩을 써야 한다는 말을 듣고 수첩과 비슷하다 할 만한 아이패드와 워드 파일을 뒤적였다. 종교 특집을 왜 하게 됐는지 떠올리며 메모들을 찾아봤다. 나는 왜 어려운 종교 문제를 건드리려고 했더라. 정신없이 하다 보면 왜 하고 있는지를 잊곤 한다.

태초의 아이디어는 다음과 같다. ‛성당 안 간 지 오래됐는데 신부님은 뭐 하고 계실까?’ 정말 작고 사소한 개인적인 의문이었다. 이런 것도 기사로 써도 되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제일 처음의 기획은 ‘코로나 시대 종교인들은 무얼 하며 살아가나’였다. 정말로 그저 무엇을 하고 사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기획안을 쓰고 인터뷰를 할수록 기사는 나의 사소한 의문과 점점 멀어졌다. 신부, 목사, 스님의 진심이 담긴 이야기가 쌓이고 쌓이면서 점점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신부, 목사, 스님에게 무작정 전화를 건다. 메일을 보낸다. 스님이 기도에 들어가서 인터뷰를 못 한다는 답변도 들어 봤다. 기도에 들어갔다니, 더 부탁할 수도 없다. 초반엔 거절도 당했지만 갈수록 느낀 것은 종교인들은 정말 이타주의적인 열정가라는 것이다. 나를 불쌍히 여겨서 인터뷰에 응해주는 것도 같다. 특히 가톨릭대 신학과에서 교수가 다섯 명이나 인터뷰에 응해줬을 때는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분명 사회문화부 기사는 인터뷰가 어려우니 무조건 많이 연락하라 했는데, 이렇게 많이 응해 주시면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다. 심지어 대부분의 취재원이 전화로 40분씩 거의 수업을 해줬다. 한 번의 인터뷰가 끝나면 하나의 배움을 얻었다. 나에게 이렇게 많은 시간을 내줬는데 몇 글자 싣지 못해 아쉬웠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듣고 나니 나 자신도 기사에 무슨 내용을 써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한동안은 너무 복잡해서 쳐다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인터뷰에 응해준 사람들에게 감사해서 꼭 의미 있는 기사를 쓰고 싶었다.

내가 만난 이들은 종교인으로서 코로나 시대에 어려운 사람들을 진심으로 돕고 싶어 했다. 스님이 “헌금이 줄어서 어렵긴 하지만 신도분들도 더 어려우니까 어려움을 함께해야지요”라고 말했을 때, 그리고 한 신부가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교우들도 어려우니까 헌금을 내라고 할 수는 없어요”라고 말했을 때, 언론에 종교 단체들이 방역 수칙을 어기고 대면 의례를 강행하는 모습만 많이 나오는 것이 안타까웠다. 이런 사람도 많은데 왜 기사에 안 나올까. 사실 기사를 쓰다 보니 나도 그런 부분을 많이 담지 못해서 아쉬웠다. 스님이 “그래도 이렇게 좋은 기사 써주려고 해줘서 좋네요”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좋은 기사가 됐는지는 확신이 없다. 그저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종교인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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