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고등학교 생활을 함께 보내고 지금까지 자주 만나 시간을 보내는 친구가 있다. 그녀와는 1학년 때 같은 반이었기에 사실 7년째 절친한 사이여야 하지만, 우리는 애석하게도 낯설었던 고등학교 첫해에 자주 다퉜고 서로의 감정에 상처를 주기 일쑤였다. 지금에야 웃으면서 과거의 우리가 서로에게 어떤 날 선 말들을 무심히 내뱉었는지를 앞다퉈 말하는 사이가 됐지만 그때의 우리에게는 꽤나 버거운 인간관계 갈등이었다. 이제는 비로소 서로가 어떤 성격의 사람인지를 잘 알고 있고 구태여 나의 감정에 대한 공감을 구하거나 관계에서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는다. 일상에 치이다 보면 갑자기 약속을 미루거나 연락이 두절되기도 하는 식이다. 그럼에도 각자의 삶이 정신없이 흐르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서운하지 않다.

대학 생활 초반이 지나면서 나를 힘들게 했던 건, 역설적이게도 사회의 무한한 다양성이었다. 학교에도 너무나 여러 유형의 사람들이 있었고 나는 그런 주변 사람들과 모두 잘 지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었다. 그런데 이런저런 순간에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의 주장을 이야기해야 할 때면 괜히 얼굴이 빨개지면서 감정만 소모되고 말았다. 그 와중에 결정적이었던 한 사건을 겪고 나서 친구에게 하소연이나 해볼까 전화를 하니, 가만히 듣고 있다가 불쑥 돌아오는 대답은 이랬다. “그냥 넌 쌀을 좋아하는 거고, 걘 밀을 좋아하는 거 아냐?” 정확한 묘사였다. 겉으로 보이기에나 거창할 뿐이지, 알고 보면 사소한 취향의 차이일 수 있는 문제에 대해 내가 괜히 심각하게 여겼던 것이다. 정확히는 상대의 경향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나 자신에 대한 자책이 컸다. 

한편, 지난 방학 중에 동행 취재를 하기 위해 처음으로 국회의사당에 방문해 의원님들을 뵙는 기회가 있었다. 같은 주에 하루는 진보 의원을, 이틀 뒤엔 보수 의원을 인터뷰하는 일정이었다. 그들은 동행한 우리 사회부 기자가 쓴 인터뷰지에 대한 답을 본인의 관심사와 전문 분야를 바탕으로 자세히 늘어놓았다. 그런데 놀라웠던 건 동일한 주제에 대해 두 명의 의원이 완전히 다른 시각과 개선책을 내놨다는 것이다. 듣기에는 각각의 관점이 충분히 합당하다고 느꼈으며, 서로 다르지만 사회에서 보장돼야 하는 가치를 우선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이 속한 두 당이 서로 화합을 해야 하는 책무가 있는 건 분명하지만 결정적인 부분에서 좁혀질 수 없는 간극이 와 닿았다.

물론 정치적 의사결정의 근거를 쌀이 좋냐, 밀이 좋냐의 취향 문제라고 치부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를 비롯한 일상과 사회생활 모두 ‘밸런스 게임’의 연속이 아닐까 싶다. 아까 말한 그 친구와 지금처럼 편해질 수 있었던 계기는 그 게임의 과정에서 이해와 포기 그 둘 사이 어딘가 위치한 관용을 택했기 때문이다. 이제 친구와 나는 낯선 순간이나 사람을 맞닥뜨릴 때마다 “존중은 하겠는데…”라며 말끝을 흐린다. 어떠한 가치든 우리는 반드시 그것을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학습했기에 함부로 비난하지 말아야 함을 안다. 그러나 그 대상에 다가가 관심과 애정을 갖는 건 또 다른 차원의 과제가 됐으며 상당한 에너지를 요한다는 걸 경험으로 깨달았다. 

그래도 여전히 내가 이해의 폭이 더 넓은 사람이었으면, 타인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상처받지 않고 단단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때론 번거롭고 그저 생경하다고 느껴질 때도 부지런한 마음으로 세상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싶다.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이 고민에 위로를 주었던 김초엽 작가의 인터뷰 답변을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해보려 한다.

“기본적으로 타인을 이해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불가능성을 대하는 태도는 다르죠. 타인을 이해할 수 없으니까 계속해서 이 상태로 놔둘 건지, 그럼에도 이 간격을 좁힐 건지 선택하는 문제죠. (…) 불가해한 다른 존재들을 이해할 때에도 잠정적 진실을 끊임없이 세워 나가면서 가까워가려고 시도하는 게 맞지 않나 싶어요, 어떤 존재를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오히려 폭력이 될 수 있어요.”

- 정의정, 「채널예스」, 「김초엽 ‘진실에 한 발자국 더 가까워지는 S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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