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 할리우드 속 아시아 여성상의 변화를 짚다

예술성과 재미를 핑계 삼아 특정 집단을 폄하하는 행동이 통하지 않는 시대다. 할리우드 역시 변화의 물결을 직격타로 맞았다. 지난해 미국 골든글로브 영화 시상식에서 아콰피나 배우가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아시아인이 수상한 최초의 사례인 까닭에 이례적이라는 평이 지배적이다. 이외에도 아시아인이 주역으로 등장한 영화 〈서치〉가 대중의 주목을 받았고,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한국 영화인 〈기생충〉이 각종 상을 휩쓸기도 했다. 이처럼 할리우드가 아시아인을 바라보는 방식은 변화하고 있다. 그 가운데 아시아 여성을 향한 시선의 전환은 더욱 두드러진다. 『대학신문』은 〈뮬란〉의 주인공에서부터 〈미나리〉의 여성 캐릭터들까지 훑어보며, 할리우드가 아시아 여성 인물을 그리는 방식을 조망했다.

과거의 편견에서 탈피해 새로운 편견을 낳다

순종적이고 가정에 헌신하는 여성이거나, 성적 매력이 넘치는 위험한 여성이거나. 아시아 여성에 대한 서양의 인식은 전자인 ‘나비부인’(Madame Butterfly), 그리고 후자인 ‘용녀’(Dragon Lady)로 나뉜다. 초기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진 아시아 여성에 대한 편견은 발전한 형태로 더욱 강하게 자리했다. 우미성 교수(연세대 영어영문학과)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서 기인한 아시아 여성의 이미지가 할리우드가 생산하는 미디어에 의해 계승되고 고착됐다”라고 밝혔다. 20세기 당시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 아시아인이 늘어나자, 이 시선은 ‘지성적이면서 가족애를 중시하는 수줍은 여성’이라는 이미지로 발전한다. 일레인 조 교수(아메리칸대 영어영문학과)는 이것이 “아시아 여성에게 ‘모범적 소수’(Model Minority)라는 사회적 기대감을 부여하기에 독이 된다”라고 말했다.

변화한 아시아 여성의 이미지는 〈뮬란〉에 그대로 투영된다. ‘뮬란’은 영리한 여인이다. 그는 가족과 사회적 전통을 중요하게 여긴다. 하지만 쾌활하고 영리한 그는 사회가 기대하는 조신한 여성이 아니다. 그래서 결혼 중매인에게 면박을 당하기도 한다. 어느 날 그는 전쟁이 벌어져 노쇠한 아버지가 징집 대상자로 지목되자, 남장을 하고 아버지 대신 입대한다. 뮬란은 전장에서 명석함과 재치를 발휘해 위기에 처한 중국을 구하고 전쟁 영웅이 된다.

뮬란에게 나비부인의 순종적인 면모는 없다. 전쟁이 끝나고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실패했던 사랑도 다시 시작하며 행복한 삶을 산다. 그런데도 그에게는 새로운 미디어가 만들어 낸 아시아 여성의 이미지가 있다. 똑똑한 뮬란이 모험을 떠날 때도, 모든 모험 끝에 맞는 결말에서도 그를 기다리는 것은 가족뿐이다. 한편 영화 속 뮬란은 서양의 기준에서 이국적인 외모가 두드러지는 미인으로 그려진다. 서양인이 설정한 아름다운 동양인은 검고 긴 머리카락과 또렷한 눈망울을 가진 모습으로 등장한다. 영화 〈미녀 삼총사〉의 ‘알렉스’와 〈해리포터〉 시리즈의 ‘초 챙’의 이미지와 유사한 여성상이 〈뮬란〉에도 고스란히 나타난 것이다.

‘아시아’ 소녀가 아닌 아시아 ‘소녀’

초기 할리우드 영화 속 아시아인 배우는 조연에 불과했다. 그러나 할리우드 시장의 저변이 미국 너머로 확대되자 아시아인의 이야기도 스크린 위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영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의 주인공 ‘라라진’이 한국계 혼혈 여성인 것도 이런 흐름을 보여준다. 로맨스 소설을 읽는 것이 취미인 라라진은 자신이 짝사랑한 남성들에게 취미로 남몰래 사랑 고백 편지를 쓰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모종의 이유로 그녀의 편지가 남성들에게 전달되자 로맨스와 거리가 멀었던 그녀의 삶은 엄청난 변화를 맞는다.

이 영화는 평범한 미국 여학생의 이야기를 아시아인 주인공을 세워서 들려준다는 특징을 가진다. 하지만 영화의 원작자 제니 한은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영화 제작사로부터 작품의 주인공을 백인으로 바꾸자는 ‘화이트 워싱’(white washing) 제안이 많았다고 밝혔다. 우미성 교수는 화이트 워싱의 원인을 “제작진이 흥행이 보장된 길을 선택하려고 하기 때문”이라 짚었다. 기존의 할리우드 영화가 백인의 취향에 맞는 작품을 양산하는 과정에서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백인 배우가 기용되는 현상이 반복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는 미국 현지에서 인종을 막론하고 큰 공감을 얻으며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 라라진이 맞닥뜨리는 상황은 청소년기의 학생이라면 한 번쯤 경험할 수 있는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청소년기의 경험이라는 특성에 인종을 둘러싼 편견이 영향을 끼치지 않게 된 셈이다. 일레인 조 교수는 “영화에서 주인공의 인종이나 민족적 특성에 대한 선입견이 관객의 경험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였다”라고 평가했다. 이제는 아시아인 여성에 대한 이미지를 투영하지 않아도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게 됐다.

살아 숨쉬는 여성의 이야기

〈미나리〉의 흥행도 같은 맥락에 서 있다. 영화는 1980년대 당시 미국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한인 이민자 이 씨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에서는 주인공이라 특정할 개인이 등장하지 않는 대신, 이 씨 가족 모두가 서사의 주체로 그려진다. 영화에 인위적으로 고정된 여성상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영화가 아시아 여성을 묘사하는 방식은 이전과 사뭇 다르다. 손주를 끔찍이 아끼는 할머니와 미국 사회에 적응하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어머니. 몸이 아픈 남동생을 간호하며 자신의 미래를 착실히 준비하는 딸. 〈미나리〉의 감독은 가족의 구성원인 여성들이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일레인 조 교수는 영화의 가치가 “세 세대에 걸친 아시아 여성이 서로를 마주하는 이야기에 있다”라며 “인물들은 할리우드가 그간 만들어 온 여성상 중 그 어떤 것에도 편입되지 않는다”라고 강조했다. 이처럼 〈미나리〉는 아시아 여성을 스크린 너머에 살아있는 존재로 담아낼 가능성을 보인다. 우미성 교수는 영화가 “아시아 여성을 평면적인 이미지로 그리지 않고, 일상 속 복잡한 관계에 얽힌 상황을 담아냈다”라고 말했다. 나비부인이나 용녀에서 탈피한, 한 ‘인간’으로서 여성을 조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특징은 할머니 순자 캐릭터를 통해 명확하게 드러난다. 순자는 뒤늦게 미국으로 건너온 만큼 한국인의 특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불만이 많고 조금은 신경질적인 이 씨 가족 사이에서 가장 순하고 무던한 인물로 그려진다. 이민 2세대로 미국인의 정체성을 내재한 손주들이 한국인 할머니를 불편하게 여기고, 상처가 될 말을 내뱉음에도 불구하고 순자는 그들을 사랑으로 품는다. 「씨네 21」에서 봉준호 감독과 윤여정 배우가 진행한 인터뷰에 따르면, 감독이 윤여정 배우에게 연기 방식을 전적으로 맡겼다고 한다. 이를 통해 가장 한국적이고도, 보다 입체적인 여성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게 된 것이다.

영화는 현실을 비추는 거울인 동시에 하나의 산업이기도 하다. 시대가 변하면서 아시아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이 변화했듯 영화가 그들을 묘사하는 방식도 조금씩 달라져 왔다. 미디어가 포착한 아시아 여성의 초상은 결과적으로 더 섬세해지고 있다. 그 초상이 더 다양하고 살아 숨 쉬는 모습을 포착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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