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은화 취재부장
채은화 취재부장

첫 정식 기자가 됐을 때 내 서툰 질문들에도 하나부터 열까지 말씀해주시던 취재원들의 모습이 기억난다. 취재원들은 저마다 겪고 있는 어려움을 나에게 이야기했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세상의 목소리를 글로 담겠다는 당찬 포부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언제부턴가 그 일이 두렵기 시작했다. 

취재원과 이야기하다 보면 때때로 기자는 어떻게 생각하냐는 식의 질문을 자주 받는다. 그럴 때면 당황하는 목소리로 “저도 공감해요. 많이 힘드실 것 같아요”라는 대답을 하곤 했다. 취재가 끝난 후에는 머릿속에 한 가지의 질문이 맴돌았다. ‘정말 그분들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어?’ 진심이 아닌 말은 아니었다. 다만 그들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 기자라는 이름을 빌려 공감하고 있는 척하는 건 아닐지 겁이 났다. 취재 내용을 바탕으로 기사를 쓸 때면 이런 고민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내 기사가 그들의 심정을 오롯이 다 담을 수 있을까.’ ‘혹시나 내 부족한 글이 오히려 피해가 되진 않을까.’ 이런 고민을 하다 보면 어느샌가 초고 마감 시간이 다가왔고 겨우 고민을 지운 채 초고를 제출하곤 했다.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 취재원의 어려움을 담는 소재를 회피하고 있었다. 이와 관련해서 지금도 생각나는 일이 있는데, 당시 첫 학기 기자였던 나는 취재부장이 준비한 소재 중 하나를 골라 기사를 써야 했다. 부장이 제시한 소재 중에는 학내 문제에 대한 당사자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 소재도 있었다. 당시 어떤 소재를 맡겠다는 말도 없이 누군가 그 소재를 먼저 가져가길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다른 기자가 그 소재를 선택하고서야 남은 소재를 맡겠다고 늦은 카톡을 보냈다. 당시 내가 맡은 소재 역시 꼭 필요한 이야기였고, 어쩌면 내가 당시 첫 학기 기자라는 걸 고려하면 그 소재가 내게 가장 적합했을 거다. 하지만 목소리를 듣겠다며 이곳에 들어왔는데, 목소리가 필요한 소재를 회피하는 내 모습을 보자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씁쓸함을 안은 채 한 학기가 지났고, 나는 당시 이런 마음이라면 학보사를 그만둬야 하는 게 아닐까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때 내 고민을 듣던 친구가 내게 전한 말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인간은 자신이 모르는 고통에는 공감하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한심한 한계다. 경험한 만큼만, 느껴본 만큼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고통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고 늘 생각한다. 자의든 타의든 타인의 고통 가까이에 있어 본 사람,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껴본 사람이 언제 어디서고 타인의 고통에 민감할 것이다.”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의 한 부분이었다. 나는 그 한심한 한계를 이해하지 못했다. 한계를 넘지 못한 채 고통을 공감하는 일을 피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이렇게 회피하기만 한다면 결국 그 어떤 목소리도 담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이곳에 끝까지 남기로 다짐했다. 학내에는 여러 상황에 처한 많은 사람이 있고, 그들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또다시 한계를 느낄 테지만 그럼에도 이곳에 남아 고통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막학기가 된 지금 여전히 세상엔 내가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 많고 여전히 나는 타인을 공감하는 데 한계를 느끼지만, 이제는 그 한계까지 이해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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