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효종 교수 사범대 교수 윤리교육과

우리가 국가없이 살 수 없는 것은 분명하지만, 영웅이나 성자 없이도 살 수 있는가. 살 수는 있겠지만, 그 삶은 너무 황폐하고 무미건조할 것이다. 삼손과 데릴라의 애틋한 ‘러브스토리’도 없고 천하무적 헤라클레스와 하늘을 받치고 있는 아트라스 사이에 벌어지는 박진감 넘치는 시소게임도 없을 것이다. 아킬레스나 헥톨, 아가멤논이 없다면, 무슨 재미로 『일리아드』를 읽으며, 또 영화 「트로이」를 보러 가겠는가. 이순신 장군이 있으니, 임진왜란을 기억할 때도 통쾌함을 느끼는 것이다.

지금 한국사회에도 성인과 의인들은 많다. 성철스님도 있고 일본에서 지하철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다 목숨을 바친 이수현씨도 있다. 정작 부족한 것은 영웅이다. 광복 60년이 되었는데도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거의 없다. 혹시 영웅이 있다면, ‘일그러진 영웅’일 뿐이다. 일그러진 영웅은 없느니만 못하다. 일찍이 플라톤도 “최선의 것의 부패는 최악(corruptio optima pessima)”이라고 갈파하지 않았던가. 한국에는 미국처럼 ‘건국의 아버지’도 없고 또 프랑스처럼 여걸 잔다르크도 없다. 대학입시 면접때 학생들에게 존경할 만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고 물어보면, 대부분이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꼽는다. 위인전을 읽지 않아 엉겹결에 나온 대답일 수 있다. 물론 자녀를 위해 헌신하는 부모가 ‘큰 영웅’은 아니지만, ‘작은 영웅’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영웅이 없는 한국 사회,
영웅을 만드는 데 너무 인색한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문제는 남는다. 우리 사회에는 왜 이렇다고 할 만한 영웅이 없을까. 영웅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우리는 영웅을 만드는데 너무 인색한 것이 아닐까. 누구는 위대한 일을 했지만, 독재를 했고, 누구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지만, 사생활이 깨끗하지 못하고… 하는 식이니 말이다.

현대사에서 영웅을 만들지 못한 결과, 우리사회는 ‘죽은 시인의 사회’처럼 ‘죽은 영웅의 사회’가 되었다. 현대사의 영웅이 없으니, 궁여지책으로 이순신, 세종, 정조 등 조선시대의 영웅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최근 MBC가 비록 방송극이지만 「영웅시대」를 방영하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조기 종결한 것은 그런 점에서 유감이다. ‘영웅’도 아닌 ‘영웅시대’조차 ‘롱런’하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영웅이 없다면, 보통사람과 범죄인들만이 사는 것이다. 하기야 한국 정치인들처럼 교도소의 담벼락을 아슬아슬하게 걷고 있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우리기업인들처럼 정경유착의 굴레에 구속되어 있는 사람들도 없을 것이다. 그 결과 역대 대통령은 모두 ‘벌거벗은 임금님’이 되었고, 기업인은 ‘문어발을 가진 탐욕갗가 되었다.

그러나 과연 한국판 처칠이나 워싱턴, 카네기는 없는가. 있는데도 알아보지 못한 채 ‘고도를 기다리는’ 것처럼, 무작정 영웅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자꾸 주위사람들에게 ‘큰 바위 얼굴’이 되라고 주문하기보다 ‘큰 바위 얼굴’이 있는데도 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곱씹어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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