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의 대화 | 김민정 극작가 인터뷰

최근 심성보 감독의 영화 〈해무〉(2014)가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되면서 공동으로 각본을 쓴 봉준호 감독이 제작에 참여한다는 소식이 화제가 됐다. 영화의 원작인 연극 「해무」(2007)를 쓴 김민정 작가는 2004년 「가족 왈츠」를 통해 데뷔 후 「해무」, 「너의 왼손」(2010), 「하나코」(2014) 등 사회적 비극에서 영감을 얻은 진중하고 깊이 있는 희곡을 써왔다. 이런 그의 독특한 연극적 색채가 주목받으며 김 작가는 제3회 ‘오늘의 극작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때로는 만들어낸 이야기보다 실제 사건이 더 허구처럼 느껴져 글을 쓸 수밖에 없게 된다는 김민정 작가와 지난 23일(화), 약수역 근처 한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극작가, 세상일에 의문을 품다

김민정 작가는 대학에서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서 극작을 전공했다. 김 작가는 입학 후 「해무」를 포함해 약 세 개의 작품을 대학원에서 쓰면서 본격적으로 희곡 창작을 시작했다. 희곡을 쓰게 된 계기를 묻자 김 작가는 “대학 때 국문과에서 연극반 활동을 하며 스텝 일을 하고 연출도 맡으면서 자연스럽게 연극과 친해졌다”라며 “연극이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일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라고 이야기했다.

사회에서 벌어지는 사건·사고에 대한 의문은 김민정 작가가 글을 쓰는 원동력이다. 김 작가는 “나는 인물보다 사건에 먼저 끌리는 편이다”라며 “‘현실에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나지?’라는 질문을 모두와 공유하고픈 마음으로 희곡을 쓴다”라고 이야기했다. 김 작가의 작품은 주로 실제 사건의 일부를 가져와 자신이 표현하려는 주제를 덧붙여 가공하는 방식으로 탄생한다. 제7태창호 사건*을 배경으로 한 「해무」, 아프가니스탄 선교사 피랍 사태*를 배경으로 한 「너의 왼손」, 아동 학대 사건을 다룬 「나 여기 있어!」 등 주요작 대부분이 실제 사건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그는 “2001년 뉴스에서 태창호 사건이 보도됐을 때, 한 선원이 ‘어창에 태운 사람들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선원들이 쓴 소주만 말없이 들이켰다’라고 진술한 것이 인상적이었다”라며 “그들이 느꼈을 죄책감이 먹먹하게 다가왔다”라고 말했다. 그 경험은 「해무」의 창작 배경이 됐다.

안개가 더 짙어진다. 앞뒤를 분간할 수 없는 안개.

완호: 안개 속이서, 이 뵈도 않는 안개 속에서 난 자꾸 그니덜이 보이네. 하긴 나가 그이덜 모가지를 다 따부렀응게. (귀를 잡고 신경질적으로 잡아 뜯으며) 자꾸 나한테 말을 거네. 고만, 고만 하라고. 춥다고. 숨이 맥힌다고. (중략) 고만 날 보고 어찌라고. 고만 고만 고만!그래 나가 잘못 했네. 나가 자네들 죽게 했어. (후략)

- 「해무」 중

김민정 작가는 직접 취재를 하고 사람들을 만나며 작품의 얼개를 다듬는다. 그는 주로 뉴스, 다큐 등에서 소재를 얻거나 리서치를 한다. 김 작가는 “「해무」를 쓸 때 여수 바닷가에서 선원들과 해경을 만나 취재하기도 하고, 친구가 목회 활동을 하던 교회에서 연변 출신 조선족을 인터뷰하기도 했다”라고 회고했다. 그러나 취재 과정이 늘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김 작가는 “여자라는 이유로 배에 탈 수 없게 해 같이 간 남자 일행이 대신 취재를 해주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태창호 사건이 그저 교통사고 같은 것이라던 어떤 남자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며, “교통사고라고 하기엔 너무 아까운 인명이 희생됐다”라고 회고했다.

암전 속,

소리 바다에서 만난 짙은 안개를 해무라 한다. 바다에서 바람보다 무서운 것은 바로 안개다. 파도에도 길이 있고 바람에도 길이 있으나 안개에는 길이 없다. (중략) 어둠이 아닌 빛 속에서 길을 잃는 것, 그것이 해무가 주는 공포다. 어둠 속에선 불을 밝히면 되지만 빛 속에선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 「해무」 중

연극 <해무>가 시작할 때 암전 속에서 들리는 소리는 작가의 작품 메모를 연극에 삽입한 것이다. 그는 “어부들이 맞닥뜨린 상황이 마치 해무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평범한 선원이었던 ‘완호 아재’의 목소리로 이 문구를 담았다”라며 “이런 문구가 작품의 길잡이 역할을 하기도 한다”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김민정 작가는 주제의식이 담긴 짧은 문구를 구상한 후 작품 작업에 들어가곤 한다. 그는 “데뷔작인 「가족 왈츠」에서도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해 ‘나’로 끝이 난다’라는 문구를 통해 이 모든 일이 주인공 ‘인수’의 기억 속에서 이뤄진다는 점을 눈치챌 수 있게 했다”라고 말했다.

 

부조리한 구조 아래 희생되는 사람들

준석: 주님이 역사하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갑니다. 아프리카, 남미, 동남아시아, 남극이라도.

(중략)

미영: 송목사님과 시복이처럼 되려고 거기에 또 가십니까?죽으려고요?

준석: 하나님의 뜻입니다, 미영 자매.

미영: 아니요. 하나님의 뜻이 아니죠. 교회의 뜻입니다. 시복이와 송 목사님을 죽게 한 건 교회라고요. 왜 멈추지 않아요? 위험이 불을 보듯 보이는데. 더 얼마나 죽어야 이 일을 멈추실 건가요 교회는?

- 「너의 왼손」 중

김 작가는 실제 사건의 아이러니를 포착해 그 안에서 희생되는 개인의 아픔에 주목한다. 「너의 왼손」에서는 중동 지역으로 선교를 나간 사람들이 탈레반에 의해 희생되고, 생존자들은 고통 속에 살게 된다. 주인공 ‘미영’은 신에 대한 믿음에서 행복을 희구했지만, 연인 ‘시복’의 죽음으로 신과 전쟁, 그리고 선교의 딜레마가 강요하는 희생의 부조리를 깨닫는다. 김 작가는 “종교적 믿음이라는 명목 아래 개인을 위험에 빠뜨리는 교회의 한 면모를 비판하고 싶었다”라고 설명했다.

미영: (내래이션) 시복아 ··· 난 완전히 길을 잃었어. 분명히 벗어나 왔는데 아직도 사막 한가운데야. (중략) 난 그 먼 이역만리 사막에 그대로 갇혀 버렸어. (중략) 도무지 길을 찾을 수가 없어. 알려줘! 가르쳐 줘 ··· 시복아!··· 안시복!

아프가니스탄 파병에 관한 TV 내레이션이 미영의 외침을 지운다.

- 「너의 왼손」 중

김민정 작가의 작품들은 대체로 희망을 노래하기보다 앞으로도 이어질 비극을 암시하며 마무리된다. 「해무」에서는 결국 해경 정찰선에 의해 배가 발견되고, 「너의 왼손」에서는 아프가니스탄 파병 동의안 처리를 둘러싼 정치 공방이 이뤄지고 있다는 뉴스가 흘러나온다. 그래서 작품을 읽은 독자는 책을 덮은 후에도 무거운 마음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김민정 작가는 “작가로 살아가면서 비극적인 현실을 마주할 때마다 느끼는 부채감을 작품에 녹여낸다”라고 말했다.

연극, 시공간을 직조하는 예술

다른 문학 장르와 달리 희곡은 제한된 시공간에서 이야기를 압축해 보여주는 연극의 대본이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인물의 속마음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소설과 달리, 희곡은 등장인물의 과장된 행동과 대사에 담긴 상징적 의미를 동원해 플롯이 진행된다. 김민정 작가는 “연극은 시간과 공간을 직조하는 예술”이라며 “무대 위의 시공간을 어떻게 조합하는지에 따라 관객에게 보여줄 수 있는 세계가 달라지는 것이 연극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김 작가는 과거와 현재, 기억과 현실, 나라와 나라를 넘나드는 역동적인 장면 전환을 통해 자신만의 시공간을 직조해낸다.

한분이: 난... 살려달라고 달리기만 했어. 나무가 빽빽한 숲으로 숨어들어서 내쳐 달리고 또 달리고. 무조건 배가 닿는 항구로 뛴 거야... 금아랑 같이... 곧 쓰러질 듯한 꽃분이 미친 듯이 중얼거리며 걷는 모습이 보인다. 달리려고 해도 기운이 없어 걸을 수밖에 없다. 

꽃분: 금아, 조금만 가면 된다. 포기하면 안 돼 ··· 갈 수 있어. 우리 집에 갈 수 있어.  

- 「하나코」 중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한분이’ 할머니가 동생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 「하나코」에서는 한분이 할머니가 과거의 자신(‘꽃분’)을 만나는 장면이 있다. 과거와 현재의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을 눈앞에서 생생하게 보는 경험은 관객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김 작가는 처음 ‘위안부’에 대한 이야기를 쓰겠다고 했을 때, 주변으로부터 이미 많이 다뤄진 주제 아니냐는 시선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개인에게 영향을 주는 가장 좋은 기록은 감동이 있는 문학 작품을 통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라며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작품 후반부에서 동생을 그리워하며 “나도 당신들처럼 행복하게 살기 위해 태어났다”라고 외치는 한분이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독자는 마치 자신이 어두운 역사의 현장에 함께 서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한편 극작가는 희곡을 쓸 뿐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과 하나의 팀을 이뤄 연극을 만들어내는 직업이다. 오는 4월부터 김민정 작가는 알베르 까뮈의 동명 작품을 각색한 연극 〈정의의 사람들〉을 무대에 올린다. 김 작가는 “학교에서 배우, 연출, 무대 감독 등 다양한 역할을 맡으면서 연극이라는 장르의 특징을 더욱 잘 이해하게 돼 

배우들의 연습도 자주 참관한다”라며 “처음에 배우들과 초고를 읽는 순간이 굉장히 떨린다”라고 밝혔다. 그는 “배우들의 질문에 답할 때 곤혹스럽기도 하지만 그 순간을 견뎌야 비로소 한 팀이 되는 기분이다”라며 함께 하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희곡 작가를 희망하는 후배들에게 조언을 부탁하자 김 작가는 “희곡 작업은 힘들고 고단한 데 비해 보상이 크지 않은 일”이라며 “고독을 견딜 줄 알아야 하고, 다른 사람들과 협업하려는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라고 당부했다. 무엇보다 “연극을 많이 보고 고민하며 글을 많이 써봤으면 한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냐는 질문에 김 작가는 “세월이 지나도 촌스럽지 않은 작품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답했다. 시대적 비극을 깊이 있게 탐구한 작가로 기억될 김민정 작가의 향후 작품 활동을 응원한다.

*제7태창호 사건: 2001년 10월 중국인 49명, 재중교포 11명이 어선 태창호에 숨어 전라남도 여수로 밀입국을 시도하다가 일부 인원이 질식사하자 선장과 선원들이 사망한 26명을 바다에 던진 사건

*아프가니스탄 선교사 피랍 사태: 2007년 7월 아프가니스탄 단기 선교 목적으로 출국한 분당샘물교회 교인 중 두 명이 탈레반에 의해 납치돼 살해당한 사건

 

사진: 송유하 기자 yooha614@snu.ac.kr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