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철 교수(정치외교학부)
이정철 교수(정치외교학부)

북한의 김정은 정권을 합리성이라는 잣대로 바라보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달콤한 민족주의로 북녘땅을 생각하다가도 망언과 도발을 서슴지 않는 저들의 행태를 보면 분노가 앞서는 것을 피할 도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냉정과 자제’로 되돌아가면 북한의 도발마저 우세(primacy)를 점하기 위한 의도적 광기(madman theory)로 번역해 볼 여지는 있다. 합리성을 가치나 도덕이 체현된 두터운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옅게만(thin) 생각할 경우다. 북한의 행태는 글로벌 가치에는 반하지만, 자기들이 지켜온 역사적 경로와 그에 내재한 이익을 사수한다는 견지에서는 일관성을 그리고 때로는 효율성마저 갖고 있다. ‘합리적 비합리성’(Rational Irrationality)이 북한 이해의 첫 번째 인식론적 키워드인 이유이다. 북한의 도발은 예측 가능성이 없고 이 점에서 일관되지 않다는 반론도 가능하지만, 사건이 지난 후 인과관계를 역추적해보면 그마저도 우리 측 정보 기관의 한계였거나 우리 내부의 민관 인지부조화 혹은 비대칭 정보 능력의 결과로 판명 나는 경우도 많다. 소위 참주식 폭정을 보여주기 위해 북한의 예측 불가능성을 부각시키는 것은 대적 선전으로는 유의미하지만, 우리의 무능력을 광고하는 양날의 검이기도 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한편 “잔 매 앞에 장사 없다”라는 우리 속담이 증명하듯 지속적이고 일관된 ‘제재’가 상대방을 굴복시키고 협상의 장을 강제한다는 주장은 매력적이다. 차단(Interdiction)과 강압(Coercion)의 강도가 높을수록 제재가 더욱 힘 있게 작동한다는 논법은 탈냉전 시기나 아랍 스프링의 경험을 통해 더욱 큰 힘을 받은 가설이다. 그런데 그런 시민 봉기의 미래가 민주적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던 현실은 봉기의 원인이 된 제재가 인도주의적 결손이라는 단점을 갖고 있고 그 결과 질서 없는 미래를 야기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낳았다. 뿐만 아니라 일부 신권위주의 체제들이 붕괴하기보다는 국제 제재 레짐에 대항하는 전선을 형성하는 것 또한 예사롭지 않다. 쿠바, 이란, 베네주엘라, 미얀마에 이어 북한을 보면 회복탄력성이라는 단어가 민주주의 체제의 전유물이 아님을 느끼게 된다. 제재가 타겟 정권의 정책 수단을 ‘붕괴’시키면 좋겠지만, 때로는 독재 권력의 정당성을 더 높여가는 역설도 재연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이나 러시아뿐 아니라 아시아 국가들에서 경제발전과 민주화의 비대칭성을 연구해 온 신권위주의 체제론의 주제인 독재 국가의 회복 탄력성(Autocratic Resilience) 논법이 적용될 수 있냐는 질문은 제재와 생존의 경계를 넘나드는 북한을 읽는 두 번째 키워드인 셈이다.

세 번째 키워드는 정체성(Identity Politics)이다. 국제 관계론에서도 정치 경제와 합리성 예찬보다는 문화와 정체성을 되묻는 추세가 확산하고 있다. 동아시아 지정학의 거대 맥락 ‘내’에서 대결과 화해를 거듭하고 있는 북한은 우리와 어떤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는가? ‘북한과 우리’를 묶는 하나의 정체성을 상정하는 것이 불편하다는 매끈한 목소리가 질척거리는 역사의 궤도를 내칠 수만 있다면 경청해야 하겠다. 하지만 이 불편한 ‘우리’를 둘러싼 정체성 논법이야말로 북한 독법의 대전제이다. 대북 우위 테제를 전제하면 북한과 북한 주민에 대한 동정과 혐오는 동전의 양면이다. 우월감에 근거한 동정 가득한 시선은 열패감을 직감할 때 느닷없이 적대와 혐오로 돌변하기도 한다. 도발에 대한 혐오의 근원이 공동체 안팎의 구획과 그 우열 비교에 있다면 공동체의 범주 설정과 그 정체성에 대한 성찰이 불가피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민족공동체와 평화공동체의 낡은 이분법을 벗어나기 위해 문재인 정부가 던진 생명공동체 논법은 북한의 거듭되는 망언과 도발 앞에 좀스러운가? 지혜로운가?

이정철 교수

정치외교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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