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미디어부 박창현 기자
뉴미디어부 박창현 기자

드디어 끝났다. 지난 3개월간 박완서 타계 10주기 다큐멘터리 3부작을 준비하며 조금도 쉬지 못했다. 학보사 최초의 프리미엄 다큐멘터리라는데 잘하고 싶었다. 그래서 10편의 온라인 기사와 18쪽짜리 논문 한 편을 읽고 기획안을 작성했고, 책 11권, 논문 17편, 기사 7편을 완독해서 장정 원고지 256매에 이르는 3부작 대본을 완성했다.

이제 막 수습 꼬리표를 뗀 만큼 세상에 대해서도 너무 쉽게 생각했다. ‘그래도 서울대 학보사인데’라는 오만함으로 인터뷰 요청을 드린 많은 작가, 교수들로부터 긍정적인 답신을 기대했지만, 정작 마주하게 된 것은 무관심이었다. 답장이라도 받으면 호사였다. 심지어 인터뷰 당일 상대가 말도 안 되는 핑계로 바람맞혀 스터디룸 대여료만 날려 버린 적도 있으니 말이다. 반대로 ‘역시 서울대 학보사야’라며 내 소속에 감사함을 느낀 적도 많다.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 호원숙 작가의 배려로 박완서 작가의 서재까지 들어가 볼 수도 있었고, 어머니와 관련해서는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던 호원경 교수의 이야기를 최초로 실을 수도 있었다.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자신의 학력을 고졸로 표기했던 박완서 작가가 저자 소개란에 ‘서울대 중퇴’를 추가하게 된 계기도 학보사 기자라는 신분 덕분에 최초 보도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좋은 추억으로 가득하다. 취재원 모집에 난항을 겪던 중 많은 지인이 출연해 달라는 내 부탁을 선뜻 들어줬다. 그때 처음으로 헛살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 인터뷰에 응해준 21명의 취재원들도 고맙지만, 까다롭기만 한 감독을 잘 따라주고, 또 때로는 이끌어준 이서현 기자와 이호은 기자에게 가장 감사하다. 취재 과정에서 셋이 참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그중에서도 2편 인서트를 촬영하느라 평균 영하 9도의 날씨에 현저동 인왕산에서 출발해 성북구 돈암동을 돌아 잠실 장미아파트까지 25,000보를 걸었던 날이 기억에 남는다. 덕분에 그전까지는 생소했던 강북의 지리에 빠삭해졌다.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취재부터 편집까지 기자 세 명과 김규희 뉴미디어 부장이 다 해야 했다. 그 결과 이서현 기자는 학보사 최고의 사운드 엔지니어로 거듭났고, 이호은 기자는 그래픽의 달인이 됐다.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며 박완서 전문가가 된 기분이다. 솔직히 기획안을 낼 때까지만 해도 내가 읽은 박완서 작품은 장편소설과 단편집 한 권씩이 다였을 뿐, 작가의 팬은 아니었다. 하지만 인터뷰를 준비하며 그의 글을 읽다 보니 박완서라는 인간에 대한 존경심이 절로 우러났다. 50년 전 소설이 전혀 낡지 않은 이유는 필히 온갖 역경에도 꿋꿋하게 글을 써갔던 작가의 꼿꼿한 심지에 있으리라. 유약하기 짝이 없는 나는 작가의 명성에 걸맞은 영상물을 내놓지 못해 죄송스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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