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고(故) 박완서 타계 10주기

올해로 박완서 작가가 세상을 떠난 지 꼭 10년째가 됐다. 눈이 펑펑 내리던 한겨울에 전해진 타계 소식은 국내 문단 관계자들뿐만 아니라 그의 글을 사랑했던 모든 이들의 가슴을 슬픔으로 적셨다. 독자들은 더 이상 박완서 작가의 새로운 글을 만날 수 없음에도 남아있는 작품을 음미하며 그가 서 있던 자리를 서성인다. 박완서 문학이 시간을 거슬러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1월부터 3개월간 『대학신문』은 대중, 유족, 그리고 문단이 박완서 작가를 기억하는 방식을 취재함으로써 질문의 답을 찾고자 했다.

만인의 작가, 글에 살다

박완서 문학은 마치 만화경 같다. 조금만 관점을 틀어 봐도 글의 결이 완전히 달라지기도 하며, 하나의 작품 세계 안에서 다양한 문학적 경관이 펼쳐지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20대부터 60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연령대의 사람들이 그의 글을 즐겨 읽는다. 그들은 작가를 향한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장르나 주제에 상관없이 박완서 문학을 탐독한다. 그렇다고 전 세대의 독자가 동일한 박완서론을 공유하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기에 지난 1~2월 두 달 동안 서로 다른 나이대의 독자들을 직접 만나 봤다.

20대 박완서가 근무했던 미국 PX 소재지
20대 박완서가 근무했던 미국 PX 소재지

박완서 작가를 그리는 방식의 편차는 20~30대 그룹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국어 교과서나 문제집 등의 교수 매체에서 작가를 처음 접했다는 점과 그를 한국 현대사의 산증인으로 그리는 경향은 공통되게 나타났다. 그러나 중·고등학교에서 배웠던 소설 이외의 글에 대해서는 스스로 찾아 읽은 작품이 속한 시기에 따라 의견이 두 가지로 갈렸다. 「도둑맞은 가난」, 『엄마의 말뚝』 등 초·중기작을 주로 본 경우, 박 작가는 냉소를 머금은 채 부정한 현실을 거침없이 폭로하는 중년의 여인으로 묘사됐다. 반면에 『그 많던 싱아를 누가 다 먹었을까』와 같은 후기 소설이나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등의 수필집을 많이 읽은 독자들은 작가를 자연을 사랑하고, 세상 사람들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할머니로 떠올렸다. 이처럼 작가의 초상이 띠는 양면성에 대해 장승환 씨(한양대 경영학부·21)는 “편안하면서도 날카로운 면이 있기에 박완서는 헤아릴 수 없는 작가”라고 표현했다.

'자전거 도둑'의 배경 세운상가
'자전거 도둑'의 배경 세운상가

회사원과 교사로 구성된 40대 취재원들은 박완서 문학을 통해 인생을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다. 삼십 년에 가까운 세월을 같은 직장에서 근무한 박민아 씨(회사원·48)는 박 작가의 글로부터 “사회 비판적인 날카로운 지적보다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감정에 대한 예민한 통찰이 느껴진다”라며 “부끄러워할 줄 아는 내가 돼야겠다고 생각한 점에서 꼭 나 같았다”라고 말했다. 학교와 집을 오가는 ‘워킹맘’ 교사들은 「친절한 복희씨」를 비롯한 단편들에 가감 없이 표현된 중년 여성의 삶을 직접 자신의 삶에 투영해 보며 큰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박완서 문학의 성찰적 효과는 50~60대 그룹에서도 발견됐다. 「조선일보」 김민철 기자는 평소 관심사였던 꽃과 박 작가의 글을 결부해 자신이 사랑한 자연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하고, 이를 『꽃으로 박완서를 읽다』라는 책으로 정리했다. 또한 여정성 교수(소비자학과)는 「한 말씀만 하소서」라는 작품을 읽고 “지금까지 그 어떤 목사님의 말씀보다도 나의 모태 신앙인 기독교를 돌아보게 했다”라고 고백했다. 이 밖에 작가의 글을 인용해 자신의 가치관을 젊은 세대에게 전하려는 노년의 독자들도 있었다.

박완서가 오남매를 키웠던 보문동
박완서가 오남매를 키웠던 보문동

 

엄마의 말뚝을 그리다

박완서 작가의 문학과 개인사는 커다란 교집합을 이룬다. 소설가가 자신의 인생을 작품에 반영하는 것이 드문 현상은 아니지만, 박 작가의 글은 특히나 자전적 요소가 두드러진다. 이에 그의 사적 공간에 대한 이해는 그의 작품 세계를 해석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 박완서 작가의 가족 중 장녀 호원숙 작가와 삼녀 호원경 교수(의학과)를 찾아가 봤다.

구리 아치울 마을의 노란집에서 손주들과 대가족을 이뤄 지내기도 했던 박완서 작가는 집안의 가훈이나 좌우명 정하기를 완강히 거부할 정도로 가족 개개인의 자유를 중시했다. 호원숙 작가는 그런 어머니에 대해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고 누구를 억압하지도 않았던 사람”이었다며 자신에게 선택의 자유를 준 것이 가장 고마웠다고 말했다. 호원경 교수 또한 그런 어머니의 양육 방식을 “각자 개성을 키우면서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사랑”이었다고 표현했다. 이러한 작가의 가치관은 그의 수필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에도 드러난다. 부모의 관심과 사랑이 지나치면 자식을 짓누르는 무게가 될 수 있다고 믿었던 박 작가는 자식들이 부모의 보살핌을 편히 느낄 수 있도록 ‘사랑의 절도’를 강조했다. 아울러 박완서의 자녀들은 작가로서 일하면서도 가족을 힘써 보살피는 그의 모습을 자연스레 배우고 좇았다.

구리시 아치울 마을에 위치한 박완서의 노란집
구리시 아치울 마을에 위치한 박완서의 노란집

한편 박완서 작가가 불혹에 『나목』으로 등단하자 호원숙 작가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고 전했다.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그는 “엄마가 다른 세계의 사람 같은 느낌이 들었다”라며 “자전적인 내용이 작품에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스스로 소화하기 어려웠다”라고 회고했다. 이는 어머니 박 작가 또한 알고 있던 딸의 속마음이었고 그는 그런 딸을 걱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호원숙 작가는 복잡했던 당시 심경에 대해 “그건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어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머니가 무척 자랑스러웠다고 말했다. 이후 1991년 호원숙 작가는 「행복한 예술가의 초상」이라는 제목의 박완서 일대기를 남겼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인왕산 등굣길을 지나며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라고 묻던 꼬마 박완서는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가 됐다. 싱아가 많았던 그의 고향 박적골은 전쟁과 이데올로기로 오염되지 않은 순수의 공간인 동시에 작가의 문학적 이상향이다. 따라서 싱아는 한국전쟁에서 살아남은 박완서 작가가 인간의 잔혹성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제시한 상징물로 해석된다. 40년에 걸친 작가의 창작 활동은 싱아를 되찾는 여정이었다고 치부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의 작품 세계를 함축해 놓은 박완서 문학 앨범 『모든 것에 따뜻함이 숨어있다』가 그와 호원숙 작가의 글로 시작해 문학 평론가의 비평으로 마무리되는 것처럼 『대학신문』 역시 평론가, 문학 박사, 출판인, 현역 작가들을 만나 박완서 작가가 한국 문단에 남긴 발자취를 추적했다.

꼬마 박완서가 자란 현저동
꼬마 박완서가 자란 현저동

박완서 작가는 「여성동아」 장편 소설 공모에서 『나목』이 당선되며 등단했다. 처음부터 대중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그였지만, 여성 잡지로 등단한 탓에 데뷔 초 문단에서는 주목받지 못했다. 그랬던 박완서 작가는 1973년 겨울, 김주연 평론가가 「문학과 지성」에 단편 소설 「지렁이 울음소리」와 「부처님 근처」를 재수록함으로써 문단에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박완서 작가의 소설은 한국 현대사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문학적으로 큰 의의를 지닌다. 작가는 가장 사적인 이야기로 가장 민족적이고 역사적인 아픔을 효과적으로 그려냈다. 전쟁으로 오빠를 잃고 대학을 중퇴해야 했지만,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갈라놓은 분단의 역사야말로 박완서 문학의 근간을 이룬다. 하지만 그의 문학은 분단의 아픔뿐만 아니라 6·25전쟁을 겪으며 잘못된 물질주의적 가치관을 갖게 된 중산층의 역사 또한 기록하고 있다. 한경희 박사(국어국문학과)는 “박완서 작품이 70~80년대 한국의 중산층이 만들어질 당시의 삶을 기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라고 밝혔다.

또한 박완서 작가는 스스로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한국 여성주의 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권영민 명예교수(국어국문학과)는 이데올로기적 요소를 빼고 박완서의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 박완서 문학을 ‘문화주의적 여성주의’라고 명했다. 박완서 작품은 남녀평등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삶을 그려내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박완서 자신도 한국 여성 운동의 흐름이 자신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했으며, 생전에는 활발히 여성 독자들과 상호작용하며 여성 운동의 흐름을 문학에 반영하려 했다. 한경희 박사는 “박완서 작가는 생전에 여성 독자가 부르는 자리가 있으면 대부분 참석해 자기 문학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문학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박완서 작가가 떠난 지 10년, 지금 문단에서 그의 위치는 어디쯤일까. 민음사 김화진 편집자는 “오랜 시간 문단과 평단에서 우러러보는 동시에 대중에게도 지속적으로 사랑받는 작가는 박완서가 거의 유일하다”라고 말했다. 현역 작가들에게도 그는 깨달음을 주는 대선배였다. 노정숙 수필가는 “박완서 작가는 글을 재밌고 쉽게 써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선생님”이라고 회상했다. 문단의 사람들에게 박완서 작가는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울림을 주는 문장을 써내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다.

박완서 문학이 가진 진정한 힘은 소통과 집요함에 있다. 읽기 쉬운 글이 사실은 가장 쓰기 어렵기에 작가의 글쓰기는 그야말로 천의무봉의 경지에 올랐다고 평가된다. 비극적 가족사조차 소재로 활용할 정도로 치밀하게 문학에 정진한 끝에 작가는 문명의 폭력성에서 벗어났을 때 비로소 인간의 진정한 자유가 실현됨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작가 박완서가 남긴 정신적 유산은 인간의 사고가 점점 극단화되고 감정이 메말라 가는 오늘날 더욱 빛을 발한다.

*본 특집 내용은 박완서 작가 타계 10주기 다큐멘터리 3부작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 기반한다. 이 영상물은 『대학신문』 창간 이래 최초 다큐멘터리로, 『대학신문』 웹사이트(snunews.com)나 유튜브 계정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사진: 이서현 기자 mint1237@snu.ac.kr

레이아웃: 이다경 부편집장 lid0411@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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