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치고는 사뭇 많은 양의 비가 두 번의 주말 동안 내리다 보니 올해 벚꽃 구경은 다 한 듯싶다. 마음 놓고 꽃놀이 다닐 수 없는 두 번째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인 탓인가도 해보지만, 인헌초등학교에서 낙성대공원까지 이어지는 길이 벌써 푸릇푸릇해진 것을 보니 얄궂은 봄비가 막 희붉어진 꽃잎들을 야멸차게 떨궈 낸 것이 틀림없다.

엊그제 처(妻)와 보라매공원을 거닐며 져버린 벚꽃을 아쉬워하자, 처는 사람들이 왜 그리 벚꽃에 ‘환장하는지’ 모르겠다고 반문했다. 개나리처럼 색이 선명하지도 않고, 진달래같이 먹는 것도 아니며, 장미꽃같이 향이 짙지도, 철쭉처럼 한창 따뜻할 때 오래 피어 있지도 않은데, 쌀쌀한 기운이 남아있는 동안 며칠 피다 마는 벚꽃이 무에 그리 매력이 있느냐는 주장이었다. 그르게, 뭐가 좋아서 벚꽃 타령들을 할까?

벚꽃의 아름다움이라 하면, 무엇보다도 바람에 사르르 흩날리는 꽃비가 연상되지 않을까 싶다.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던,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이형기 시인의 「낙화(洛花)」가 생각나는 것도 자연스럽다. 희붉은 꽃비는 하필 중간시험을 치러 고사장을 찾아다니는 학생들의 머리 위에 흩뿌려져 그렇잖아도 심란한 마음을 더욱 동하게 했었다. 시험을 앞두고 공부 외에 모든 것이 즐거웠던 그때의 아련함이 덧씌워져 벚꽃이 더욱 아까워진다.

한 순간 휘몰아치는 바람에 미련 없이 자신을 떨궈버리는 벚꽃은, 종종 대의(大義)를 위해 장렬히 산화(散華)하는 숭고한 존재로 그려진다. 우리나라 이상으로 벚꽃을 애완(愛玩)해 온 일본에서 특히 ‘비장미’를 강조해 왔는데, 문화인류학자 오오누키 에미코(大貫惠美子)의 저서 『사쿠라가 지다 젊음도 지다』는 벚꽃이 어떻게 제국일본의 군국주의를 낭만화하고 가미가제(神風) 특공대의 ‘옥쇄’(玉碎)를 미화하는 데 동원됐는지 그려냈다. 여기서 벚꽃은 가장 화려하고 싱싱할 때 주군의 영(令)에 따라 자기의 전부를 초개(草芥)와 같이 내던진, 지고지순한 충절의 상징이다.

이와는 정반대로, 벚꽃의 단명함은 주로 ‘사꾸라’라는 일본식 발음을 빌어 변절자, 회색분자를 풍자하는 비유로도 쓰인다. 시쳇말로는 ‘2중대·3소대’에 해당한다고 할까. 1960~80년대 자료들을 보면 주로 친(親)정부적 행보를 취한 야당 인사들을 ‘사꾸라’라 일컫는 표현이 등장하곤 한다. 동일한 현상도 어떻게 바라보냐에 따라 정반대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예전 같았으면 꽃잎 소나기를 맞으며 ‘벚꽃’이 가지는 선명성과 일관됨의 미학을 찬양했을 텐데, 이분법적 진영논리가 만연해 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보고 있자면 이제는 사꾸라의 역할을 재평가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일신의 영달과 안위를 추구하는 사꾸라라면 지탄받아 마땅하겠지만, 언제든지 옥쇄할 준비가 되어있는 진영 내 벚꽃의 매도(罵倒)를 무릅쓰고서라도 대화와 타협의 미학을 견지하려는 사꾸라라면 오히려 지금 시대에 필요한 존재가 아닐까. 한 해만에 사꾸라같이 바뀐 민심의 흐름도 이러한 방향을 가리키는 것은 아닌지 감히 되짚어본다.

처와는 채 이레를 못 가는 벚꽃의 희소성에 사람들이 ‘환장하는’ 것으로 합의를 봤지만, 앞으로 몇 년 간 우리나라에서 벚꽃을 구경하지 못할 수 있는 필자 입장에서는 안타까움이 가시질 않는다. 독자 여러분께서도 사진부 기자님들이 포착해 낸 오늘 자 『대학신문』 ‘관악의 봄’ 면을 통해 반절 가까이 지나가버린 계절에 대한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래보시길 바란다. 

고용준 간사

삽화: 김윤영 기자 kookie1026@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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