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FT 예술, 아우라 부활인가 광기인가
NFT 예술, 아우라 부활인가 광기인가
  • 대학신문
  • 승인 2021.04.11 0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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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현 교수(언론정보학과)
이재현 교수(언론정보학과)

아날로그 복제, 디지털 복제를 거쳐 AI와 NFT 예술에 이른 이 때 아우라의 명암이 기술 비평가의 관심을 끈다.

2018년 10월 기계학습과 GAN이라는 AI 기법을 활용해 만들어낸 ‘에드몽 드 벨라미’라는 초상화 작품이 크리스티 경매에서 약 5억 원에 낙찰됐다. 이 작품은 위조지폐와 같은 원본의 복제품(copy)이 아니라 원본이 아예 없는 날조품(fake)이다. 이런 작품은 항상 원본에 대한 열등감, 피해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 원본 없는 날조품이지만 렘브란트나 모차르트 스타일의 작품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기술적으로 기계 학습, 특히 지도 학습은 기본적으로 패턴 인식이다.) 그런 점에서 발터 벤야민의 말대로 날조품에는 원본과 같은 아우라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GAN이라는 AI 기술을 활용했다는 점이 아우라 비슷한 그 무엇을 주는 듯하다.

이보다 더 놀라운 일이 얼마 전 일어났다. 지난 3월 11일 디지털 아티스트인 비플(마이크 윈켈만)이 NFT 기술을 적용해 만들어낸 JPG 그림파일 하나가 크리스티 경매에서 약 780억 원에 낙찰된 것이다. ‘에브리데이즈-처음 5000일’이라는 이 작품은 2007년부터 자신이 온라인에 올린 이미지들을 콜라주한 것으로, GAN과 같은 AI 기술을 활용한 것도 아니다. 겉보기에는 흔한 이미지 파일일 뿐이다. 핵심은 NFT(non-fungible token, 대체불가 토큰)에 있다. 이는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하기는 하지만, 암호화폐와 달리 디지털 자산에 고유한 코드를 부여해 상호교환이 불가능하게, 즉 유일무이하게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블록체인 네트워크가 유일함, 고유함을 보증하기 때문에 더이상 복제품-날조품 논란은 없다. 날조품이지만 복제품과 달리 원본, 정확히는 원본의 스타일과의 관계에서 오는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어딘가 있을지 모를 원본에 대한 열등감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백설공주가 살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거울 앞에서 불안감을 보이는 새 왕비처럼 원본 없는 시뮬라크르, 즉 유일한 그 무엇이 되고자 하는 욕망은 불안정하다.

이제 백설공주를 죽여야 한다. NFT 예술은 이제 원본을 실제로 죽이기로 마음 먹는다. 크립토 팬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한 집단은 로버트 뱅크스의 ‘멍청이들’이라는 작품을 구입해 이를 스캔, 즉 디지털화한 다음 공개적으로 태워버렸다. 이는 NFT 예술의 미학적 의미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이들은 ‘뱅크스 진품 태워버리기 의식’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 과정을 보란 듯이 유튜브로 보여준다. 주목할 점은 이들이 이 이벤트를 보여주며 한 말이다. 물리적 작품이 남아 있으면 그 작품의 값어치는 물리적 작품에 의거해 매겨진다고. 드디어 백설공주는 죽었다. 왕비만이 남게 된 것이다.

무한히 복제되던, 그래서 복사의 대명사 같은 한낱 JPG 파일이 유일무이한 작품이 된 것이다. 아예 원본을 생각할 필요가 없는 시뮬라크르가 탄생한 것이다. 아우라는 이렇게 NFT를 활용해 기술적으로 창출된다. 브루노 라투르는 정교한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면 복제품에도 아우라가 구현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새로운 해석으로 간주되는 공연예술의 ‘재생산물’과 달리 회화, 조각과 같은 장르 작품들의 재생산물은 부정적인 복제물로만 간주되어 왔는데, 고도의 디지털 기술의 등장으로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이에 라투르는 원본-복제라는 틀에서 벗어나 좋은 복제-나쁜 복제의 틀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원본을 원천적으로 제거해 버리는 NFT 예술은 이 틀마저도 폐기시켜 버린다.

문제는 기술적 아우라라고 주장하는 그 무엇이 상품처럼 물질적으로 값어치가 매겨진다는데 있다. NFT 예술가, 판매상, 기술자, 비평가는 서로 손잡고 비트코인에 목매던 암호화폐 추종자들의 욕망을 자극해 기술적 아우라의 값으로 수십~수백만 달러를 매긴다. 비플처럼 잘나가는 NFT 예술가들을 보라, 그리고 천정부지로 치솟는 그들의 작품 가격을. 

NFT 작품에 주목하는 것은 기술적 숭고미(료타르)가 아닌 어마어마한 가격 탓이다. 우리는 NFT에서 광기를 목도한다. 하지만 그 광기는 롤랑 바르트가 말한 푼크툼으로서의 광기도 벤야민이 말한 아우라도 아닌 그저 투기적 광기일 뿐이다!

이재현 교수(언론정보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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