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영화감독의 윤리성에 대한 고찰

지난 4월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진행됐다. 여기서는 다양한 인종과 국적의 배우들에게 상을 수여함으로써 예술계에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정치적 올바름’을 실현하려는 움직임이 드러났다. 그러나 비도덕적인 행보를 보이는 거장들조차 포용하고 추앙하는 영화계의 분위기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듯하다. 이들의 작품에 대한 논란은 영화계의 유서 깊은 난제 중 하나다. 본인의 예술 세계를 구현하기 위해 배우와 스태프를 괴롭히는 경우부터 실제로 범죄를 저지른 감독들에 이르기까지, 천재 감독의 민낯이 세상에 공개될수록 대중은 영화를 순수하게 즐기지 못하는 상황에 놓이고 있다. 『대학신문』은 영화의 가치와 감독 사이의 딜레마를 파헤쳤다.

영화감독이 신이 되기까지

우리는 영화 제작 과정에서 영화감독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영화가 흥행하면 그 공을 감독에게 돌리고, 실패할 때도 마찬가지로 이것이 감독의 책임이라고 이해한다. 이런 경향의 기저에는 ‘누벨바그 운동’과 ‘저자주의’ 이념이 자리하고 있다. 김호영 교수(한양대 영화학과)는 “초기의 영화감독은 영화를 매개로 창작 활동을 전개하는 예술가였지만, 할리우드 상업 영화가 유행하게 되면서 감독은 영화 산업에 종사하는 기능인으로 전락했다”라며 “과거 예술가로서 영화감독이 가졌던 위상을 복원하려던 시도가 저자주의와 누벨바그 운동으로 나타났다”라고 영화사의 흐름을 정리했다. 노광우 영화 칼럼니스트는 누벨바그 운동이 일어났던 때를 “영화광이 영화감독이 되고, 영화를 ‘감독의 정신적 작업의 산물’로 보는 패러다임을 담고 있는 저자주의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난 시기”라고 평가했다. 즉 누벨바그 운동과 저자주의는 일반 대중이 영화감독을 영화 창작의 중심에 위치하는 존재로 여기게 된 근원인 셈이다.

예술가가 최선의 창작물을 만들어내기 위한 명분으로 괴팍한 언행을 보인 것이 비단 최근의 현상만은 아니다. 천재의 광기를 용인하는 경향은 오랜 역사 동안 지속돼왔다. 그러나 예술가들의 치부가 세상에 공개되는 일이 점차 많아지면서 창작자와 창작물을 분리해서 바라보는 것이 옳은지를 두고 열띤 토론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박우성 평론가는 이것이 “우리 사회가 과거보다 젠더 이슈나 인권 감수성 등과 관련된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이면서 발생한 현상”이라며 “창작자의 관점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작품에 화살이 향함으로써 그를 둘러싼 도덕적 논란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창작자의 도덕적 무결을 요구하기 시작한 대중의 의견은 평론가나 영화제 위원처럼 영화계 내의 ‘엘리트’로 분류되는 집단의 의견과 충돌하기도 한다. 대중은 아무리 고평가받을 만한 명작이라도 감독이 도덕적으로 비판받을 행동을 한 경우 수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관점으로 영화를 보이콧하거나, 온라인상에 비판 의견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반면 영화계에서는 여전히 감독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고 작품의 예술적 가치만 중시하는 경우가 많다. 지난해 2월 28일 프랑스에서 열린 ‘제45회 세자르 영화제’의 감독상 수상을 둘러싸고 제기됐던 문제가 대표적인 예다. 감독상을 받은 로만 폴란스키 감독은 영화계의 거장 중 한 명이지만 10대 여성을 대상으로 성폭행을 일삼은 아동 성범죄자이기도 하다. 대중은 수상 결과를 격렬하게 비판했다. 프랑스에서는 수상을 반대하는 시위까지 벌어질 정도로 반발이 거셌다.

예술을 예술로만 볼 수 있을까?

영화는 문화 산업인 동시에 예술이기 때문에 권위자들의 의견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김현빈 씨(동국대 영화학과·17)는 전문가의 평론이나 수상 행위가 “문화적 우월성을 주장하는 엘리트 집단에 의해 그 가치가 인정받는다는 상징적 행위”라는 점에서 대중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이 같은 엘리트층의 감상 태도와 대중의 판단이 다를 경우 양쪽 간 갈등은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이 현상은 ‘비도덕적인 감독들의 작품을 소비해도 되는가’라는 문제에서 시작해 ‘영화를 창작자의 온전한 산물이라고 봐도 되는 것인가’와 같은 난제로 이어진다.

작품을 외부 요소와 분리하는 것이 가능한지에 관한 논의는 예술 분야 전반에 걸쳐서 꾸준히 이어져왔다. 특히 대중성이 월등하게 높은 영화에서 이런 논의가 더 활발하게 이뤄진다. 감상자 대부분은 영화와 현실을 완전히 분리하거나 둘을 동일시하는 이분법적인 작품 이해가 불가능하다고 본다. 기본적으로 둘을 절충해 감상해야 한다고 보지만, 그럼에도 양극단 중 어느 한쪽에 더 기울어진 감상 태도를 보일 때가 많다. 이처럼 둘의 연관성을 둘러싼 이야기는 작품과 창작자가 맺는 관계에 대한 논의부터 시작해 사회와 맺는 관계에 관한 논의로 확장되고 있다.

우선, 창작물을 외부 요소로부터 분리해 감상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옳다는 의견이 있다. 그들은 예술은 예술일 뿐이기에 창작자의 사생활에 관한 평가는 지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양민정 강사(미학과)는 “작품에 창작자의 가치관이 녹아 있을 수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작품의 의미는 작품 내부에 존재하기에 창작자의 의도로 환원되지는 않는다”라며 “평가의 대상은 작품일 뿐 창작자가 아니다”라고 정리했다.

작품을 결코 외부로부터 분리해서 볼 수 없다고 이해하는 쪽 역시 존재한다. 이들은 외부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내재적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김호영 교수는 “사회적 기표들을 최대한 제거하려고 노력한 영화들조차도, 그런 노력 자체가 일종의 사회성을 반영하고 있다”라며 작품을 외재적 가치로부터 완전히 분리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나아가 영화는 카메라를 통해 현실의 복제품을 만든다는 점에서 현실과의 연관성이 더욱 강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박우성 평론가는 “영화는 그 어떤 예술보다도 우리의 세상에 가까이 다가가며, 영화의 피사체는 우리가 찍는 세상과 가장 닮아있다”라며 카메라에 담긴 내용을 현실에서 분리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한 “작품을 효과적으로 해석하기 위해서 임시적으로 작가에 대한 판단을 유보한다고 가정할 수 있지만 창작자의 존재를 간과할 수는 없다”라며 “작품은 작가의 창작물인 만큼 작가의 가치관이나 경험이 드러날 수밖에 없으므로 작품의 예술성만을 볼 수 있다는 주장은 기만에 가깝다”라고 말했다.

두 관점 중 명확한 정답이 되는 것은 없다. 심영섭 평론가는 “도덕적 논란이 있는 감독이 생산한 텍스트를 이해하는 것은 수용자의 선택에 둬야 하는 문제”라며 “평가자의 권리는 이 과정에서 다양한 담론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짚었다. 작품을 바라보는 방식이 평가자마다 다를 수 있다는 점에서 양측 모두 설득력이 있는 설명이다.

악마가 만들어낸 아름다움을 앞에 둔 관객

거장의 추악한 민낯을 접한 관객은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때 영화 산업 내부자들은 사적으로 논란을 일으킨 영화감독의 존재를 이용해 더욱 적극적으로 작품을 홍보하기도 한다. 실제 배급사들은 ‘영화계의 문제아’ ‘화제의 문제작’과 같은 문구를 활용해 관객의 이목을 끌기도 한다. 김현빈 씨는 “영화의 스크린은 관객이 들어가서는 안 될 방을 열쇠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라며 “영화는 감독의 가치관을 반영하는 만큼 관객은 그 스크린을 통해서 더 위험하고 자극적인 공간을 엿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런 영화의 소비를 지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차 커지면서 영화계 전반에 걸친 변화의 움직임이 보인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박우성 평론가는 “기존의 영화계 인사들은 예술지상주의적 태도를 바탕으로 작품의 예술성이 뛰어나면 창작자의 비도덕성을 어느 정도 묵인했으나, 정치적 올바름의 대두로 경각심을 갖추는 태도가 점차 증가하는 낌새가 보인다”라고 평가했다.

이런 난관 속에서 어떤 태도를 갖추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까? 보다 건강한 영화계를 위해 제작자와 관객 모두 노력할 필요가 있다. 제작자에게 특정 감독과의 작업 혹은 소재를 지양하라고 강제할 수는 없다. 심영섭 평론가는 “표현의 자유는 예술의 절대적인 권리이기 때문에 절대적 도덕성을 강요하는 것은 예술 정신에 위배된다”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영화 산업 내부자들은 자발적인 판단에 따라 작품 내부와 외부 전반에 걸쳐서 재미와 윤리성을 모두 갖출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박우성 평론가는 “영화가 사회적 약자를 괴롭히는 도구가 된다면 이는 재미를 가장한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라며 “영화 산업 내부자들은 정치적 올바름과 재미를 모두 추구하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해야 한다”라고 역설했다.

소비자 개인 역시 영화 산업의 흐름에 큰 책임을 진다. 〈열차의 도착〉이 다수의 관객 앞에 상영됐기 때문에 최초의 영화로 이해되는 것처럼, 수용자는 영화 산업을 주도하는 주체다. 심영섭 평론가는 “문화 현상은 텍스트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관객 및 시대상과 맞물리며 형성되는 것”이라며 수용자와 영화 산업의 관계를 짚었다. 물론 비윤리적인 감독의 작품을 소비하는 개인을 비난하거나 그 행위를 저지할 수는 없다. 보이콧 운동이 그 어떤 강제력도 행사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느 정도 수위의 행동이나 발언까지 용인할 수 있는지 기준을 정하기도 어려운 노릇이다.

그럼에도 관객은 손을 놓고 무비판적으로 내용을 수용해서는 안 되며 최소한 자신의 선택이 영화계 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는 숙고해야 한다. 박우성 평론가는 “비도덕적인 영화감독의 예술적 성취를 공표하는 순간 그를 신화화하게 된다”라며 “대외적으로 작품을 소비한다는 사실을 표출할 필요는 없다”라고 제안했다. 또한 관객은 주체적으로 사유하면서 좋은 영화를 부단히 찾아다녀야 한다. 김현빈 씨는 “영화 산업의 흐름과는 무관하게 자신의 소비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인식해야 한다”라고 힘줘 이야기했다.

영화를 감상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모든 예술작품이 그렇듯 창작자도 수용자도 본인의 미감에 따라 표현하고 소비할 자유를 지닌다. 그러나 그 기저에는 대중예술로서의 성격이 공고히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우리는 영화가 지니는 문화적 가치와 사회적 파장 역시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창작자와 수용자 모두 책임감을 가지고 영화예술의 장을 만들어가는 주체로 자리하기를 바란다.

삽화: 김윤영 기자

kooki1026@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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