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문화부 이의영 기자
사회문화부 이의영 기자

우디 앨런은 내 낭만을 스크린 위에 구현하는 천재였다. 대도시 속 편집증적인 지성인이 들려주는 가슴께를 따뜻하게 울려오는 이야기들. 나는 그의 영화들을 사랑했다. 그런 도중 논란 가득한 그의 행보에 대해 알게 됐다. 동거 상대의 수양딸과의 결혼, 그리고 딜런 패로의 성추행 폭로. 충격을 받았지만 도저히 그의 작품을 놓을 수 없었다. 이런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사소하게는 배우를 혹사시키는 감독부터, 심각할 경우 범죄를 저지른 감독의 작품을 보고 감탄을 자아낸 경험은 셀 수도 없이 많다. 불광불급이라고, 우리는 천재 예술가의 광기라는 신화를 쉽사리 용인한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사랑한다고 해서 당당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누군가 좋아하는 감독을 물어오면 언제나 머뭇거려야만 했었다. 이렇게 이번 특집 기사는 온전히 개인적인 딜레마에서 출발했다.

예술을 외부로부터 분리해 그 자체만으로 볼 수 있을까? 현재까지도 예술계를 괴롭히는 망령과도 같은 질문이다. 호기롭게 기획안을 제출했던 것과 달리 걱정이 많았다. 이렇게 거대한 주제를 다뤄도 되는지, 어떻게 다뤄야 할지 막막했다. 그래도 일단 손을 대보면 답이 보이겠다는 생각으로 학술적인 논의부터 접근해봤다. 예술을 현실과 분리할 수 있는가, 사회의 기호로부터 탈피시켜 독립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온당한가 등의 질문에 대답하려고 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관념적인 차원으로만 접근해서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영화로 한정 지어 논의하기로 한 만큼 더욱 그랬다. 영화는 산업물임과 동시에 문화현상 가운데 위치하기에 현실과 가장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그리고 현실의 문제는 학술적인 논의보다 훨씬 복잡했다. 그래서 평론가들을 찾아가 목소리를 듣고, 연극영화과에 재학 중인 학생의 의견을 들었다. 답이 없는 문제에 접근한 만큼 해답을 얻지는 못했다. 그러나 다양하고도 흥미로운 의견을 들을 수 있었기에 좋았고, 깊게 생각해볼 기회를 얻어 감사했다.

기사에도 작성했듯이 어떤 입장이 옳다고 주장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영화를 사랑하는 ‘나’는 소비자로서 책임 의식을 느낀다. 영화를 소비하고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것이 작품의 창작자에게 발언권을 제공하는 것이 되고, 이로 인해 다치는 사람이 생기는 것은 싫다. 나의 예술적 카타르시스가 누군가의 눈물 위에 피어나는 꼴은 보고 싶지 않다. 더는 범죄자에게 문화예술이라 이름 지어진 면죄부를 쥐여주지 않겠다. 내가 사랑한 영화를 더럽힌 그 감독들을 저주한다. 그러나 관객들은 그런 감독들의 작품에 대한 대체재를, 혹은 더욱 뛰어난 영화를 생산하는 감독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번을 마지막으로 두 번 다시 우디 앨런의 영화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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