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석 교수(영어영문학과)
강우성 교수(영어영문학과)

정이삭 감독의 영화 〈미나리〉가 조연배우의 아카데미상 수상으로 떠들썩하다. 영화에서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지닌 인물들이 미국 내에서 ‘모범적 소수자’의 위치를 누리기까지 겪었던 지난한 여정이 담담하게 펼쳐진다. 그런데 미국에 이민 간 1세대 한국인의 모습을 담고 있는 이 영화에서 내 이목을 끌었던 것은 회고적 시선이었다. 왜 우리는 과거를 돌이켜 보려 하며, 또 우리는 과거에서 무엇을 기대하는가.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가 공공연한 현재의 삶이 팍팍하고 억압적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잊고 있던 과거에 무언가 의미 있는 삶의 흔적이 기록돼 있다고 믿는 까닭일 터이다. 이민자의 나라 미국의 자본과 미국인 감독이 만들었지만 〈미나리〉는 내게 여전히 ‘한국’에 관한 영화로 느껴졌다. 왜 그럴까.

〈미나리〉의 중심에는 새로운 문화를 접한 남녀 간의 대립과 세대 간의 갈등이 함께 들어있다. 아내와 아이들의 동의를 구하지 않는 남편의 독선이 미화될 뿐만 아니라, 이 독선은 세대 간의 갈등도 초래하는 근본 원인이 된다. 낯선 문화에서 소수자로 살아남고 성공하기 위한 분투는 이민자 가족 모두가 동의한 삶이 아니다. 〈미나리〉는 이 독선의 그림자를 도덕적 각성과 가족의 아름다운 화해로 봉합하지만 살아남은 아이들의 삶이 어떻게 펼쳐질지에는 주목하지 않는다. 잘 만들어지고 인정을 받은 영화를 굳이 폄하하자는 뜻이 아니다. 우리가 이 영화에서 보지 못한 것이 어떻게 우리를 규정하고 있는지 상기하고자 함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최근 젊은 세대의 욕망에 충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나아가 ‘이십 대 남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생각도 공공연하다. 이는 단지 재보궐선거로 등장한 화젯거리만은 아니다. 기성세대의 독선을 비판하는 외침이기에 경청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모든 ‘세대론’이 그렇듯, 여기에도 일반화의 함정이 있다. 나이 든 세대를 꼰대로 치부하는 탈정치적 논리에 이의를 제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공정을 이야기하는 이십 대 남자가 젊은 세대를 대표한다고 보는 입장이 또 다른 차별론일 수 있음을 말하려는 것일 뿐이다. 우리 사회에는 이십 대 여성도 있고, 세대를 초월해 배제돼온 소수자도 엄연히 존재한다. 세대 비판은 이 사라진 사람들의 존재를 부인해온 기성세대의 관행과 편견을 향할 때 강력한 힘이 될 수 있다. 

자유경쟁의 이름으로 끊임없는 성과의 생산과 자기계발을 강요하는 피로사회의 현실을 온존한 책임은 분명 기성세대에게 있다. 〈미나리〉의 아버지 제이콥처럼, 가족의 행복을 위한다는 사명감으로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기성세대는 정작 가족의 희생과 동의는 등한시했다. 아버지 제이콥의 실패는 소수 이민자가 마주한 현실의 장벽이 단단해서라기보다, “우리가 함께 있는 게 더 중요한 거 아냐?”라는 부인 모니카의 항변, 갈등하는 가족들에게 “다 괜찮을 거예요”라며 위로하는 큰딸 노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결과다. 그래서 순자의 선의로 헛간이 불타버렸을 때 나는 환호했다. 

사회적 생존과 성공을 위해 공정함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열악한 플랫폼 노동의 현실, 임금 차별, 지역 차별, 그리고 혐오의 정서를 문제 삼는 마음이 깃들 여지는 과연 얼마나 될까. 소수 이주민의 농장이 미국의 단단한 인종 편견을 뚫고 성공한다면 가족 모두가 행복해질까. 어디서든 잘 자라기에 “미나리는 원더풀”이라는 말이 희망의 서사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한 세대가 누리는 특권의 폐지만이 아니라 세대를 넘어선 차별의 철폐가 필요하다. 이것이 영화 〈미나리〉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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