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하림 강사(협동과정 비교문학)
박하림 강사(협동과정 비교문학)

우리는 청춘을 열정, 꿈, 도전, 가능성 따위와 직결시키면서, 한 인간의 생애 주기에서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시기이자 더 나은 미래로 연결되는 성장의 과정으로 낭만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청춘은 성장과 종종 동의어처럼 쓰이기도 하고, 사회에 의해 적극적으로 권장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권유가 우리 사회의 지배적 담론의 욕망과 무관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가령 신자유주의의 치열한 경쟁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는 청춘들에게 시스템이 약속하는 미래는 지금 힘써 퀘스트를 수행하고 레벨업을 해나간다면, 최고 레벨 이후에는 풍족한 미래의 보상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며, 그제야 비로소 사냥의 피로감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자유롭고 다채로운 플레이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노력은 성공과 발전이라는 미래의 서사에 통합돼, 각자의 성공담을 빛내줄 하나의 에피소드로 기념될 것이다. 그러나 이 땅의 청춘들이 직감하고 있는 것처럼, 최고 레벨 이후에 삶은 또 다른 경쟁적 서바이벌의 국면이 될 공산이 크다. 하지만 그렇다고 게임의 법칙을 무시하자니, 현실은 불안하기만 하다. 

오늘날 청춘들이 경험하는 현실과 성장에 대한 불안을 탁월하게 그려낸 작품으로 나는 영화 〈키리시마가 동아리 활동 그만둔대(키리시마)〉를 꼽고 싶다. 영화는 청춘 영화 제작을 둘러싸고 선생님과 아이들이 벌이는 마찰에서 시작한다. 선생님은 진정한 청춘의 일상은 사랑에 있기 때문에 연애물을 찍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아이들은 좀비물을 고집한다. 왜냐하면 이들이 경험하는 청춘의 리얼리티란, 학교라는 계급적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집단적이고 익명성을 띤 좀비는 스쿨 카스트 최하층에 속하는 자신들과 똑 닮아있다. 그런데 영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상위 계층에 속하는 아이들이 경험하는 불안에도 주목한다. 잘생기고 인기 많은 히로키는 진로 희망서에 아무것도 적지 못한다. 사실 그는 야구를 좋아하지만, 선수로 스카우트 될 정도가 아니라면 그만둬야 하는 것 아닐까 고민한다. 이런 관점은 영화부 마에다가 영화를 대하는 태도와 대비를 이룬다. 히로키와 달리 마에다는 영화를 만드는 현재의 행위를 유명한 감독이라는 성공적 미래와 연결해 의미를 찾지 않는다. 오히려 마에다는 자신이 감독이 될 수 없을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영화를 찍는 동안은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들과 연결돼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들이 찾아오고, 그것이 좋아서 영화를 찍는다. 결국 〈키리시마〉가 보여주는 것은 현재의 행위가 미래의 성과로 이어지지 않았을 때 어떻게 지금의 청춘을 긍정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다.

물론 성장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성장은 존재의 운동이자 한 개체의 변화와 차이를 지칭하는 말일 수 있고,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발생하는 인식론적 성숙을 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장의 다양한 측면을 발전 담론과 성공 서사에 한정 지을 때, 우리는 발전하지 않는 성장을, 무언가 유용한 것을 생산해내지 못하는 자신의 청춘을 미워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가 제시하는 답은 단순히 좋아하는 것을 하면 행복해진다는 것이 아니다. 냉정하게 말해 시스템에 접속해 있는 이상, 우리는 룰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마에다의 영화 활동도 마찬가지다. 학교라는 환경의 특성상, 영화 제작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끊임없이 끼어들고, 촌스러운 영화라는 타인의 평가도 피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것이 내가 좋아하는 일을 그만두거나 현재를 부정해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세계에서 살아가야 하므로, 내가 좋아하는 영역을 지켜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마에다가 레벨업 하지 않고서도 자신의 청춘을 긍정할 수 있는 이유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