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서울대 상징을 만든 사람들

학교의 상징을 떠올릴 때 엠블럼이나 학교 건물이 아닌 ‘정문’을 떠올리는 학교는 서울대가 유일하지 않을까. 게다가 이 정문은 통행문 역할뿐만 아니라 감상을 위한 조형물의 역할까지 톡톡히 해내고 있다. 입학이나 졸업 시기에는 사진을 찍으려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기도 하는 곳, 바로 ‘샤’ 정문의 이야기다. 『대학신문』에서는 정문의 디자인을 고안한 강찬균 명예교수(공예과)와 만나 ‘샤’ 정문에 얽힌 뒷이야기를 들어봤다.

 

Q. 정문은 어떻게 '샤' 모양이 됐을까?

1975년에 관악캠퍼스(관악캠)가 완공된 이후로 3년이 지날 때까지 당시 서울대에는 마땅히 정문 역할을 해내는 구조물이 없었다. 학교는 정문을 짓고자 몇 개의 시안을 제작하기로 하고, 강찬균 교수 역시 정문 시안 중 하나를 제출했다. 당시 강찬균 교수가 제출한 시안은 지금의 모습과 달리 평범한 모습의 정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문의 디자인은 쉽게 정해지지 않았고 결국 교수 9인으로 구성된 전문위원회까지 구성되기 이르자, 강 교수는 이 회의에서 그동안 생각해온 지금의 ‘샤’ 모양 정문 안을 제안했다.

강 교수는 왜 일반적인 정문 디자인과 달리 ‘샤’ 모양의 문을 생각했을까? 그는 “보이스카우트 활동 시절 보았던 ‘ㅅ’자의 천막 지붕 모양이 떠올라 문득 문을 ‘ㅅ’자로 만들어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라고 답했다. 그렇게 탄생한 ‘샤’ 정문은 지금까지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서울대의 대표적 건축물이 됐다. 민복기 교수(공예과)는 ‘샤’ 정문에 대해 “한글 디자인이 본격적으로 활용되지 않았던 시기, 정장에 담긴 ‘샤’ 모양의 조형적 특성을 이용해 문으로 디자인한 것은 당시로써는 혁신적인 생각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그저 기둥을 세우고 경첩을 달아 여닫을 수 있는 일반적인 문이 아닌, 거대한 ‘ㅅ’자로 차가 다닐 수 있게끔 생각했다는 것이 신선하다”라는 평도 남겼다. 

Q. 당시에는 반대도 많았던 ‘샤’ 정문?

샤 정문이 처음부터 많은 구성원의 지지를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정문 디자인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1977년 8월 29일 자 『대학신문』 기사에서는 ‘샤’ 디자인 채택은 구성원의 이야기를 충분히 담겠다는 학교 당국의 결정과 배치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교문 공사가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알리는 기사에서도 ‘샤’ 모양의 정문을 ‘불안정하고 균형을 잃은 문’이라고 평가했다.

정문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에 강 교수는 기존에 계획했던 것보다는 아쉬움이 남는 디자인을 선택해야 했다. 강 교수가 처음 생각한 ‘샤’ 정문은 오렌지색으로 칠해진 더욱 큰 정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여론을 고려해 강 교수의 생각보다는 조금 더 작은 황토색의 정문이 만들어졌다. 물론 지금의 ‘샤’ 정문은 도색을 거치고 조명이 달리며 더욱 화려한 문으로 변신했지만, 강 교수는 그때 계획을 실현하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는 “창작하는 사람들은 만들 당시에는 최고라고 생각하고 작품을 제작하지만, 막상 지금 와서 작품을 보면 아쉬워하곤 한다”라며 “항상 그걸로 만족하지 않고 더 좋은 걸 만들려고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역사를 되짚어 보면, 당시에는 인정을 받지 못했던 것들의 진가가 시간이 흘러 알려지는 경우가 많다. ‘샤’ 정문 역시 처음에는 환영받지 못했더라도, 지금은 서울대의 대표 상징물로 자리 잡았다. 강 교수는 “서울대 학생들이 내가 만든 정문 밑을 지나다니며 공부도 하고 꿈을 키워나갈 생각에 뿌듯하다”라며 “정문 밑을 지나다니는 학생들이 자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 됐으면 한다”라고 당부의 말을 남겼다. 지금까지는 무심코 지나쳤을지 모를 ‘샤’ 정문, 이제부터는 정문 도안을 내밀던 강 교수의 기지를 떠올려보는 것은 어떨까.

 

삽화: 김지온 기자  kion27@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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