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회 대학문학상 수상자 특별 기고

보니것이 현관에서 조영희를 반겼다. 


집에서 나는 익숙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부츠를 벗고, 통조림 하나를 꺼내, 내용물을 붓는 동안 말간 눈동자로 조영희를 집요하게 좇던 보니것은 조영희가 거실 소파에 기대어 앉자 그제야 사료통으로 향했다. 그늘진 경계선 넘어 햇빛이 드리워진 가죽 소파 귀퉁이에 옅은 회색빛이 환하게 드러났다. 어두운 회색과 옅은 회색. 어느 쪽이 진짜 색일까. 조영희는 늘 궁금했다. 밝은 쪽과 그늘진 쪽, 둘 중 어느 쪽이 진짜인지. 


조영희는 햇빛이 아직 남아 있는 쪽으로 몸을 틀었다. 소파에서는 뽀드득, 소리가 났고, 왼쪽 손등 위로 길게 뻗은 햇빛 조각이 떨어졌다. 겨울의 차가운 공기를 뚫고 왔는데도 햇빛은 여전히 따사로운 온기를 품고 있었다. 조영희는 대학 동기인 박나영을 만나고 온 참이었다.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박나영은 오랜만에 만나서는 난데없이 쥐 이야기를 꺼냈다. 집필실에서 봤다는 쥐에게 경자라는, 촌스러운 이름을 지어주고는 끼니까지 챙기는 모양이었다. 우리 집에 한 번 데려와. 보니것한테 소개해 주게. 조영희의 말에 박나영은 픽, 한쪽 입꼬리를 올렸고 조영희는 깔깔, 웃었다. 


보니것은 사료를 단번에 해치우고, 배를 거실 바닥에 바짝 붙인 채 기지개를 켠 후,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며 조영희의 다리 위로 올라왔다. 칠년 전 조영희는 길고양이였던 보니것을 집으로 데려왔다. 정확하게는 칠 년 전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보니것의 뻣뻣한 한쪽 다리가 조영희의 허벅지를 꾸욱, 파고들었다. 고양이도 꿈을 꾸는 건가 싶을 때가 가끔 있다. 눈을 감고 누워 있는 보니것이 가볍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조영희는 보니것의 뻣뻣한 한쪽 다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보니것을 집에 데리고 온 날, 조영희는 박현우를 처음 만났다. 

*

영희씨, 트라팔마도어가 어딘지 아세요?


박현우가 던진 질문에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박현우와는 데이팅 앱을 통해 알게 됐다. 대학에서 미술사를 전공했던 나는 미술관 방문을 구실로 방학이면 해외를 자주 오갔는데, 잠시 머물렀던 뉴욕의 작은 아파트에서 처음 데이팅 앱이라는 것을 접했다. 에어비앤비를 통해 구한, 주방과 이어지는 거실에 작은 방 하나가 딸린 작은 아파트에는 J라는 빨간 곱슬머리 여자가 살고 있었다. 한국 나이로 나와는 위로 띠동갑이었던 그녀는 내가 그곳에 머물렀던 2주 내내 저녁에 외출했다가 술 냄새를 풍기며 늦은 시간에 귀가하곤 했다. 나는 낮에는 구겐하임, 모마, 휘트니 등의 미술관을 관람하고 저녁에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에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은 드물었고, 그래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녀에게서는 뉴욕 지하철에서와 같은 매캐한 냄새가 났다. 


어느 날엔가 퇴근한 J가 저녁에 외출을 하지 않았고, 나도 이른 오후부터 집에 머물렀으므로 우리는 자연스레 저녁을 함께했다. 내가 파스타를 접시에 담는 동안 그녀는 자기 머리카락 색깔만큼 붉은 하우스 와인을 꺼내 잔에 따랐다. 와인에서 나는 시큼한 냄새가 역하게 느껴져 나는 들었던 잔을 내려놓았고, 그러거나 말거나 J는 자꾸 와인을 권하면서 꿀꺽꿀꺽, 마셔댔다. 식사 내내 핸드폰을 힐끔거리며 들었다 놨다 하는 J의 모양새가 거슬려 나는 쏘아붙이듯 물었다. 어디 연락 올 데라도 있어? J는 데이팅 앱에 올라와 있는 남자들을 확인하고 있다고, 오늘도 원래 그중 한 명을 만나기로 되어 있었는데 갑자기 연락이 되지 않았다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J가 말할 때마다 빨간 곱슬 머리 사이로 싸구려 액세서리가 흔들리며 반짝였는데 이 때문에 그녀의 푸석한 피부가 도드라져 보였다. 제대로 된 남자를 만나는 게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 푸념하던 J는 나에게도 데이팅 앱을 깔아보라고 권유했다.


요즘은 다들 이렇게 만나.


이후 한동안 잊고 있었던 J와의 대화가 떠올랐던 것은 귀국 후 인터넷에 난 기사를 보고서였다. 기사는 그녀가 권해주었던 데이팅 앱을 두고 요즘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이성 만남의 방식이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다들 그렇게 한다니까, 라는 생각으로 나도 앱을 설치해 보았지만 쉽지 않았다. 앱을 통해서 연락해온 남자들은 만나기도 전에 이상형이라며 대뜸 결혼 이야기를 꺼내거나 띄엄띄엄 연락하며 시간을 끄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급하게 돌진하는 남자들은 대개 다른 의도가 있었고, 그게 아니라면 여러 명과 연락을 하면서 저울질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게 됐다. 처음에 당황했던 나도 차츰 적응해 두어 명의 남자들과 동시에 연락을 주고받을 정도는 됐고, 괜찮다 싶으면 직접 만나기도 했지만 지속적으로 만남을 이어가지는 못했다. 


이런 만남들이 슬슬 지겨워지고 있을 무렵 박현우가 대화를 걸어왔다. 그의 프로필에는 펼쳐진 책 위에 누워 있는 고양이 사진이 있었고 고양이의 발 앞으로 박현우의 것으로 짐작되는 늘씬하게 뻗은 손가락이 보였다. 햇빛을 받아 윤기가 도는 고양이의 회색빛 털이 마음에 들었다. 어릴 적 마트 애견 코너에서 보았던 새끼 고양이와 비슷해 보였다. 나는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고 졸라댔고, 엄마는 단호하게 거절했었다. 넌 고양이 못 키워. 그게 엄마의 한결같은 대답이었다. 해서 나는 엄마 몰래 고양이를 보러 마트에 가곤 했는데, 어느 날 고양이가 없어지고 대신 거북이가 놓여 있었다. 그날 나는 집에 돌아가는 길에 서럽게 울었다. 


트라팔마도어요?


해외라면 제법 다녀보았지만 처음 듣는 곳이었다. 유럽 어디쯤인가 싶어 답장을 보내려는데 침대 옆 벽 위에 걸려 있는 사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런던에서 찍은 것이었다. 


트라팔가 광장은 아는데.


반쯤 장난으로 던진 답에 박현우는 반응이 없었다. 뒤늦게 인터넷을 찾아볼까 했지만 그럴 것까지 있나 싶은 데다 박현우에게서 답이 올 것 같지는 않아 그대로 잠이 들었는데, 다음 날 아침 박현우에게서 답장이 와 있었다. 


커트 보니것 소설에 나오는 곳이예요. 트라팔마도어요.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졸업 후에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마땅한 자리를 얻지 못해 대학 시절 부지런히 과외를 해서 모은 돈과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약간의 보조, 그리고 은행 빚을 합쳐 조그마한 책방을 시작하게 됐다,는 것이 박현우의 설명이었다. 그동안 데이팅 앱에서 만났던 남자들과 달리 박현우의 배경은 배경이랄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내 마음을 끌었던 것이라면, 책방이라는 단어였다. 서점과는 다르게 책방이라는 단어에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구석이 있었다. 책들이 가득 쌓여 있는 아담한 방 한가운데 고양이와 함께 앉아 있는, 곧게 뻗은 손가락을 가진 남자. 그것이 내가 상상하는 박현우의 모습이었다.


혼자 운영하는 조그마한 책방이예요. 


경기도 어디엔가 있다는 박현우의 책방은 인터넷에서는 검색되지 않았다. 그래도 요즘 같은 시대에 홍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다못해 SNS에라도 올리던가. 박현우에게서는 자신감인지 체념인지 알 수 없는 태도가 묻어났다. 


잘 되세요?


나는 장사나 사업이라는 단어를 붙이려다 책방이라는 단어에 어울릴법한 표현을 찾지 못해, 결국 주어를 빼고 물었다. 


잘 안 돼요. 제 취향대로 책을 들이다 보니 손님이 별로 없네요.


그러곤 박현우는 웃는 표시를 보냈다. 박현우의 대답에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난감했다. 여자에게 손님이 별로 없다고, 벌이가 시원찮다고, 덤덤하게 말하는 남자의 심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아니, 그 전에 손님을 끌지 못하는 취향은 또 뭔지. 왠지 심통이 난 나는 SNS에 홍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예요? 하고 삼켜두었던 말을 기어이 내뱉었다.


전 SNS는 잘 못해서요.


가식이나 허세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온전한 솔직함이 박현우가 가진 매력이었다. 지나칠 정도로 솔직해서 상대를 괜한 열등감에 시달리게 만드는 솔직함이었다. 그의 솔직함은 무해한 것이었지만, 나는 그 무해함에도 가끔 생채기가 났다. 나는 여행 다니는 동안 찍었던 사진들이 잔뜩 올라와 있는 내 페이스북 계정을 떠올렸다. 박현우를 만났던 앱에 올려두었던 사진들도 죄다 해외에서 찍은 사진들이었다. 에펠탑, 자유의 여신상, 오페라 하우스 등을 배경으로 한 화려한 야경 사진들. 거기에는 엄마와 찍은 사진들도 몇 장 있었다. 중년의 나이에도 소녀다운 구석이 남아 있던 엄마는 미술관 방문을 핑계로 해외에 나가 있을 적 몇 번인가 내가 있는 곳을 방문했다. 둘이서 에펠탑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은 한동안 엄마의 핸드폰 배경화면으로 남아 있었다. 그 무렵부터 엄마는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비슷한 사람이랑 만나야 해. 그래야 행복하다. 


그 말의 의미는 어렴풋했지만 엄마의 표정에 일렁이던 불안감은 또렷히 알아볼 수 있었다. 너랑 비슷한 사람과 만나야 해. 그래서 나는 그때마다 알았어, 라며 부러 크게 고개를 끄덕이곤 했지만 엄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꼭 뒤에 말을 덧붙였다. 그래야 행복하다. 그래야 문장이 완성된다는 듯이.


영희씨 말대로 저도 한번 해봐도 좋을 것 같네요. 마음 써줘서 고마워요. 좋은 사람이네요, 영희씨는.


답장도 하기 전에 박현우에게서 먼저 메시지가 왔다. 누가 마음을 써줬다고. 솔직함 말고도 그가 가진 매력은 조금 더 묘한 것이었다. 날 선 말도 선하게 받을 줄 아는 그는 내가 좋은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좋은 사람. 그를 만나기 전에는 한 번도 나 자신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조금 전까지 거북살스러웠던 마음은 단번에 사라졌지만 변덕스러운 기분을 들키고 싶지 않아 나는 부러 조금 퉁명스럽게 답했다. 그래요. 해봐요. 


박현우와의 대화가 끝난 후 나는 침대 옆, 책상에 딸린 아이보리색 책꽂이를 훑어봤다. 책꽂이에는 전공 책 몇 권과 여행 서적 두어 권이 비스듬히 꽂혀 있었다. 제일 위쪽 가운데 칸에는 프랑스어로 된 낡은 어린 왕자 한 권이 앞표지가 보이도록 세워져 있었다. 파리에 갔을 때 유명하다고 해서 들른 한 조그마한 책방에서 구입한 것이었다. 한 세기 가까이 되었다는 허름한 책방은 전에 봤던 로맨스 영화에서와 같은 낭만적인 분위기 대신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훅, 덮쳤던 퀴퀴한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불쾌감에 대충 둘러보고 나오려는데, 책방의 한구석에 적혀 있던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이방인들에게 불친절하지 마라. 위장한 천사일지도 모르니.’


내 방에는 겨우 몇 권의 책이 있었지만, 교수인 아버지 덕분에 집 곳곳은 책으로 넘쳐났다. 주로 아버지의 서재에 몰려 있었지만, 거실 중앙에 놓인 커다란 천연 목재로 만든 진열장도 책이 차지하고 있었다. 주로 제목이 한자로 되어 있거나 세로로 쓰인 책들이었다. 소설책도 더러 있었으나 나는 아버지의 책에 손을 댄 일이 거의 없었다. 때문에 나는 스스로가 책과는 거리가 있는 타입이라는 사실을 일찍이 깨달았다. 그나마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 초반 사이에 읽었던 『오만과 편견』 같은 고전적인 로맨스 몇 권 정도가 거의 전부인 그런 타입. 어쩌다 서점에 가도 베스트셀러 코너에만 잠깐 머무는 타입. 그게 나였다. 


그래서 영문학을 전공했다가 지금은 책방을 운영한다는 이 남자와 무슨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박현우는 첫 질문, 그러니까 트라팔마도어를 아느냐는 첫 질문 이후로는 책에 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고, 나는 내심 안도했다. 대신 박현우와의 사이에서는 밥은 먹었는지, 뭐 하는지 따위의 사소한 대화가 오갔다. 박현우는 주로 질문하는 쪽이었고, 나는 답하는 쪽이었다. 박현우는 내 이야기를 궁금해했고, 간혹 듣고 싶어 안달 난 사람 마냥 굴기까지 했다. 나는 그런 그의 호기심을 나에 대한 관심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내가 해외에서 보낸 시간에 특히 관심을 보였는데, 그 곳의 냄새는 어땠는지, 공기는 어땠는지, 낮과 밤에 도시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어떻게 달랐는지, 나 스스로도 간신히 기억해내야 하는 질문들을 던지곤 했다. 그러다 너무 혼자 떠들었나 싶어 내가 질문을 던질라치면 박현우는 맨날 똑같죠, 책방에 있었어요, 라는 대답으로 짧게 응수했고, 그럴 때면 박현우가 정말 책으로 만들어진 다른 세상에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 이야기 듣는 거 안 지겨우세요?


저는 영희씨 이야기를 듣는 게 좋아요. 그럼 저도 영희씨랑 그 곳에 있는 것만 같거든요.


나는 살짝 달아오른 얼굴을 박현우가 볼 수 없어 다행이라 여겼다. 그 무렵 우리 두 사람의 대화는 앱을 벗어나 전화 통화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알게 된 사실은 그의 목소리에서 바람 소리가 난다는 것이었다. 바람 소리와 함께 그의 중저음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 때마다 나는 달뜬 기분이 되어 그가 나와 비슷한 사람이길 바랐다. 행복하려면 그는 나와 비슷한 사람이어야만 했다. 해서 나는 그 바람이 그가 있는 세계의 커다란 구멍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 상상하며 그곳에 가보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며 잠드는 날이 늘어갔다. 그러니까, 당시 박현우에 대한 내 마음은 호기심, 불안, 동경 등이 뒤죽박죽 섞인, 처음으로 이국땅을 밟았을 때 받았던 인상과 같은 어떤 것이었다.  

 

트라팔마도어가 어딘지 알아요.


학기 말이 되자 시험공부를 핑계로 학교 도서관에 늦게까지 머물면서 박현우와의 전화 통화에 빠져드는 날이 이어졌다. 한 해의 마지막 달, 기말고사 기간에 학교는 늘 가라앉아 보였다. 이파리 하나 없는 나뭇가지 아래로 검정 패딩을 입은 대학생들이 잰걸음으로 오가고 있었다. 점심을 같이했던 동기들은 먼저 들어갔고 나는 통화할 일이 있다는 핑계로 도서관 뒤 벤치에 앉았다. 박나영이 이런 나를 향해 픽,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선 다른 동기들과 도서관으로 들어간 뒤였다. 짧은 침묵 후에 핸드폰 너머로 박현우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듣는 시원한 웃음이었다. 


기억하고 있었네요.


코트 속에는 뭉근한 기운이 돌았고, 입에서는 뜨거운 입김이 흘러나왔다. 


그 소설 좋아하세요? 


나는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았다는 말은 애써 하지 않았다. 그나마 소설 제목 정도만 확인했을 뿐이었다.


페이지를 넘기는 게 아까운 책들이 있어요. 보니것의 작품이 그래요. 아까워서 느리게 읽게 돼요. 


박현우는 평소와 달리 제법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보니것이 그 작품을 공상과학 소설처럼 쓴 건 자신이 겪은 일을 글로 풀어낸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해요. 아이러니하죠. 본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에 관해 쓰는데 정작 그 일은 언급하지 못한다는 게요.


박현우는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작가를 보니것이라고 불렀다. 나는 그가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작가의 이름을 입모양으로 따라해 보았다. 보니것. 입에 잘 붙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영희씨, 정말로 트라팔마도어가 어딘지 아세요? 저는 잘 모르겠거든요. 


박현우의 목소리에서 다시 바람 소리가 났다. 

며칠 뒤 이른 오후, 아파트 단지 안 정원에 놓여 있는 벤치에 앉아 박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학에서의 마지막 시험을 치른 날이었다. 느낌이 묘했지만 실감이 나지는 않았다. 예전엔 시험이 끝나면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거나 여행을 떠나기도 하면서 호들갑을 떨었지만, 마지막 시험은 조용히 지나갔다. 누구는 이미 취직해서 학교는 형식적으로 다니는 것과 다름없었고, 몇몇은 시험이 끝난 날에도 면접 스터디를 가거나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러 학원으로 향했다. 박나영도 과외가 있다며 시험을 끝내자마자 서둘러 교실을 떠났다. 


아쉬운 마음을 박현우에게 토로하면서, 나는 박현우로부터 만나자는 말이 나오지는 않을까, 내심 기대했다. 박현우를 안지 벌써 한 달 남짓 되었고 나는 슬슬 조급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박현우는 위로 섞인 말만 건넬 뿐 만나자는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자존심도 상한 데다 서운한 기분마저 들어, 나는 기어이 에둘러 묻고 말았다. 


현우씨, 현우씨는 저 직접 만나보고 싶지 않으세요?


박현우의 대답 대신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희야, 여기서 뭐하니?


엄마였다. 나는 화들짝 놀란 나머지 통화 종료 버튼을 눌러 황급히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교회에서 열리는 크리스마스 행사에서 연주할 피아노곡을 연습하기 위해 교회에 가는 중이던 엄마가 나를 발견한 것이었다. 엄마가 통화 내용을 들었을까 하는 걱정이 먼저 앞섰다. 친구랑 통화 중이었어. 엄마의 눈길을 피하며 둘러댔는데, 다행히 엄마는 더는 캐묻지 않았다. 엄마는 같이 교회에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지만 나는 피곤하다며 집으로 들어왔다.


아무도 없는 집 거실에는 햇빛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문자라도 보낼만 하건만 박현우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왠지 미안한 마음과 억울한 마음이 뒤섞여 코트도 벗지 않은 채 풀썩, 소파에 앉아 박현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우리 만나요. 십여 분쯤 지나 박현우에게서 답이 왔다. 


영희씨, 수요일 저녁 7시 어때요?


그날은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나는 바로 답장을 보냈다. 좋아요.

날이 날이라 길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박현우가 급하게 예약을 해두었다는 약속 장소는 지하에 있는 허름한 레스토랑이었는데, 레스토랑이라기보다는 오래된 찻집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었다. 문을 열자 귀에 익은 캐럴송이 나지막이 들려왔다. 카페 안에는 연녹색 칸막이들 사이로 색이 바랜 자줏빛 천으로 된 소파들이 놓여 있었다. 공기 중에는 한약 냄새 비슷한 것이 옅게 배어 있었다. 언젠가 맡아본 적 있는 냄새 같았는데 그게 어디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고 나도 모르게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박현우는 벽과 벽이 이어지는 모퉁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감색 니트에 연회색 셔츠를 받쳐 입은 박현우는 예상했던 대로 반듯하고 단정한 이미지였다. 하지만 장난기가 묻어나는 서글서글한 눈매는 예상치 못한 것이어서 나도 모르게 슬며시 웃음이 났다. 


춥죠? 곧 따뜻해질 거예요.


그는 주머니에서 핫 팩을 꺼내 내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손가락은 사진에서보다 더 길고 하얳다. 다시 코트 속이 뭉근해졌다. 우리는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곧장 피자와 맥주를 주문했다. 그는 전화 통화에서보다 더 활기차 보였고 말도 더 많이 했으며 더 선해 보였다. 우리는 간간이 웃음을 터트리며 술잔을 기울였다. 술기운 탓인지, 그의 웃음 탓인지 내 맥박이 점점 빨라졌다.


그렇게 한 시간 쯤 흘러 박현우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소파에서 일어섰을 때였다. 맥주를 홀짝이며 그의 뒷모습을 흘끗 바라보던 나는 화들짝 놀라 손에서 맥주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처음에는 그가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것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박현우는 다리를 절고 있었다. 아주 심하지는 않아도 누구나 알아볼 정도는 되었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몸이 좌우로 기우뚱거렸다. 보고 싶지 않은데도 보지 않을 수 없는 걸음새였다. 나는 그대로 얼어붙은 채 그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메트로놈처럼 좌우로 기우뚱거리는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박현우가 화장실에서 돌아왔을 때 그와 나 사이의 공기는 달라져 있었다. 자꾸만 대화가 끊기고,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우리 둘 다 그의 다리에 관해서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나는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빨리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가 혹시라도 다리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까 두려웠다. 공기 중에서 나는 한약 비슷한 냄새가 점점 짙어져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그러다 문득 이 냄새를 어디서 맡았던 것인지가 기억났다. 뉴욕의 빨간 곱슬머리 여자 J. 그 나이든 여자에게서 나던 매캐한 냄새와 비슷했다. 그런데도 박현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에 가기 전에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어요. 한과같은거 있죠. 그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드시는 꽈배기나 유과 같은거요. 그런걸 파는 거예요. 그게 한 통에 2만원인데 그걸 팔면 절반을 나한테 준대요. 열 박스만 팔면 십 만원인 거예요. 쭈뼛거리면서 국밥집도 들어가고, 철물점도 들어가고, 세탁소도 들어가요. 근데 아무도 안 사줘요. 안녕하세요, 하면 살갑게 웃다가도 한과를 내밀기만 하면 쫓아내요. 재수 없다고 욕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열 박스는 커녕 한 박스도 못 팔 모양이었어요. 그러다 조그마한 약국에 들어갔어요. 약사 아저씨가 한과를 앞에 두고 묻대요. 몇 살이냐. 들어간 대학은 어디냐. 무슨 과냐. 오지랖도 넓네, 뭐 이런걸 물어. 짜증이 나서 대충 대답했어요. 아저씨는 안쪽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만원짜리 두 장이랑 박카스 한 병을 내밀어요. 나도 그 대학 나왔다. 이거 내가 한 통 사줄게. 너 이런거 하지 마라. 가서 공부 열심히 해라. 저는 박카스를 손에 쥐고 울었어요. 내 인생에서 그렇게 서럽게 운 적이 없었어요. 아저씨가 화장지를 내밀어요. 감, 끅, 사, 끄윽, 합니, 끄, 다, 끅끅. 그렇게 약국에서 나와서 만 원짜리 한 장은 타고 왔던 봉고차에 두고 다른 한 장은 주머니에 넣어서 집에 갔어요. 웃기죠.


박현우는 정말 웃기다는 듯 하하, 웃었고 나는 어쩐지 울고 싶은 마음이 되었다.

우리는 딸랑, 하는 카페 문을 열고 지상으로 올라가는 좁은 계단 앞에 섰다. 처음 내려올 땐 몰랐는데 아래에서 올려다본 계단은 제법 길이가 되었다. 박현우가 먼저 계단을 오르고 내가 그 뒤를 따랐다. 한 계단씩 오를 때마다 그의 몸은 좌우로 더 크게 기울었다. 나는 고개를 처박고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계단을 올랐다. 마지막 계단 위에서 길거리로 발을 내딛으려는데 쥐 한 마리가 불쑥 발밑을 지나갔다. 나는 놀라서 엄마야, 소리쳤고 박현우는 쥐를 내쫓으려 팔을 휘저으며 다가왔는데, 그러는 통에 좌우로 기우뚱거리는 거리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그사이에 쥐는 사라지고 없었고, 그가 이마에 땀을 훔치며 나를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나도 웃으려고 했지만 내 표정은 그의 걸음새만큼이나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그가 가로등 조명 아래 훤히 드러난 일그러진 내 표정을 보지 않았기를 바랐다.


그와 내가 함께 지하철역을 향해 걷는 동안 겨울바람이 자꾸만 머리카락을 흩트려놓았다. 우리는 지하철 개폐기 앞에 멈춰 섰다. 그와 나는 반대 방향에서 지하철을 타야 했다.


영희씨, 크리스마스 선물이예요. 


박현우는 어깨에 걸린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내밀었다. 그가 이야기했던 소설책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다며 거절하려 했지만 그는 한사코 소설책을 건네주었다. 책을 쥐어 주는 그의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이 낯설게 느껴졌다. 고마워요. 나는 그의 서글서글한 눈매를 피해 계단을 내려갔다.


영희씨라면 트라팔마도어가 어딘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어요. 영희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예요. -현우.


지하철을 기다리며 책을 펼치니 맨 앞장에 박현우가 적어 놓은 글귀가 보였다. 정갈하고 단정한 글씨체였다. 코끝이 뜨끈해지고 목구멍이 부어오른 듯한 묵직한 감각이 전해져왔다. 지하철 안에는 사람들이 꽉꽉, 들어서 있었다. 나는 목에 뭔가 걸린 것만 같아 마른 침을 계속 삼켜댔지만 소용없었다. 아니야, 난 그곳이 어딘지 몰라. 매캐한 냄새, 한약 냄새. 그 냄새들이 지하철 안에서도 계속 짙어지는 것 같아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그럴수록 내 안에서 소리치는 목소리도 커져 갔다. 난 좋은 사람이 아니야. 마치 그러면 냄새가 사라져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마침내 내릴 곳이 가까워오자 나는 서둘러 지하철을 빠져나왔다. 지하철 선반에 두고 온 책을 누군가 가져가라고, 뒤에서 부르는 것만 같았다.


지하철역을 빠져나와 가로등이 밝혀진 아파트 입구로 들어서려는데 어디선가 아기 울음소리 비슷한 소리가 들렸다. 소리 나는 쪽으로 가보니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는데 다리를 다쳤는지 걸음새가 불편해 보였다. 내가 다가가자 고양이는 낮게 가르릉거릴 뿐이었다. 며칠 굶은 듯 했다. 나는 조심스레 다친 다리를 받쳐서 고양이를 들어 올렸다. 고양이는 가벼웠다. 너무 가벼워서 나는 그만 왈칵 눈물이 나오려는 걸 꿀꺽, 삼켜야 했다. 


집은 비어 있었다. 다들 크리스마스 행사를 위해 교회에 가 있을 터였다. 코트를 벗기 전에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내 보니 박현우에게서 문자가 와있었다. 


영희씨, 트라팔마도어에 가지 않을래요?


답장을 하는 대신 나는 고양이를 화장실로 데려가 조심스레 씻기며 불편해 보이는 다리를 살펴보았다. 상처가 있긴 했지만 오래된 것으로 보였다. 거실에 깔린 카펫 위에 앉아 드라이기로 고양이를 말리고 데운 우유를 슬쩍 내밀었다. 아직 경계심을 풀지 않은 고양이가 몸을 뒤로 빼고서 우유를 할짝거리는 것을 보면서 나는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괜찮아. 이제 괜찮아. 텔레비전에서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

핸드폰 벨소리에 조영희가 잠에서 깼다. 거실 소파에 기댄 채 까무룩 잠이 든 모양이었다. 보니것은 베란다의 햇빛 귀퉁이에 앉아 조영희 쪽을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 겨울 햇빛이 거실 밖으로 빠져나가 쌀쌀해진 공기가 몸을 감쌌다. 


“주연 어머님, 아직 안 오셔서 전화드렸어요.” 


어린이집이었다. 박나영과의 약속 때문에 평소보다 주연을 늦게까지 맡겨두기로 했는데 그것도 데리러 갈 시간이 지난 모양이었다. 시계를 보니 5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죄송해요. 지금 바로 갈게요.” 


박현우와 만나고 얼마 되지 않아 조영희는 대학을 졸업했다. 졸업 후에는 모친의 지인이 운영하는 갤러리에서 도슨트로 일했다. 유학을 갈까도 잠깐 고민했지만, 조영희의 부모는 하나뿐인 딸을 외국에 몇 년씩 보내는 걸 탐탁치 않아 했다. 일한 기간은 짧았다. 조영희는 곧 이모의 소개로 지금의 남편인 김민재를 만나 결혼했다. 김민재를 처음 만난 날 조영희는 그의 뭉툭한 손과 서늘한 눈매에 거부감을 느꼈다. 조영희가 김민재를 만나고 집에 들어서자 모친이 이것저것 물은 후 덧붙였다. 너랑 비슷한 남자야. 괜찮을 거야. 나랑 비슷하다고? 저 남자는 나랑 하나도 안 비슷해. 닮은 구석이라곤 전혀 없다고. 모친의 확신에 찬 표정에 조영희는 하려던 말을 속으로 삼켰다.


이후 김민재는 꾸준히 연락을 해왔다. 김민재는 다정다감한 타입은 아니었으나 조영희에게, 조영희의 부모에게, 그리고 이후에는 주연에게 성실했다. 결혼 후에는 조영희에게 도우미 아주머니를 부르라고 권했지만 조영희는 끝내 거절했다. 김민재와 결혼하고 사 년여가 지났을 무렵 조영희의 모친은 췌장암 판정을 받았다. 아직 오십 대 초반에 불과했던 모친에게 그나마 남아 있는 젊음을 양분 삼아, 암은 빠르게 온몸으로 퍼졌다. 앙상해진 모친의 팔다리를 보며 조영희는 차마 모친에게 묻고 싶었던 말을 묻지 못했다. 모친은 반년을 넘기지 못했고, 모친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서 행복했는지 조영희는 끝내 알지 못했다.


“엄마가 미안해, 깜빡 잠들었나봐.” 


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주연은 제 엄마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입을 계속 삐죽거렸다. 몇 차례의 사과에도 아이는 쉽게 용서할 마음이 없는 듯 보였다. 이따 저녁에 아빠랑 주연이가 좋아하는 피자 먹으러 가자. 주연은 뜸을 들이더니 그제야 별수 없다는 듯 새초롬하게 대답했다. 좋아. 


집에서 김민재를 기다리려 했으나 주연이 보채는 바람에 조영희는 주연을 데리고 먼저 피자 가게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가족 단위로 많이 찾는 이 가게는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인기 있는 캐릭터들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친구 생일 파티 때 처음 와 본 뒤로 주연은 이곳을 좋아하게 됐다. 김민재는 병원에서 출발한 지 삼십 분쯤 지나서 가게에 도착했다. 오늘 엄마가 나 데리러 늦게 왔어. 주연은 조영희를 이르면서 제 아빠에게 안겼다. 


“엄마가 바쁜 일이 있었겠지. 그렇지, 당신?” 


김민재가 주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아이를 달래는 건지 조영희를 힐책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당초 피자 가게에서 외식하자는 연락을 김민재는 달가워하지 않았다. 밀가루 음식을 싫어하는 김민재는 주연과 특별한 날에만 피자를 먹기로 약속해둔 터였다. 마음이 불편해진 조영희는 입을 다물었다.


“안녕하세요.”


낯선 목소리가 세 식구가 앉아 있는 테이블 위로 조그맣고 얇은 책자를 한 권 내밀었다. 처음에는 교회에서 나눠주는 팜플렛인줄 알았다. 표지 한가운데 적힌 ‘사랑하는 당신’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제목 아래 ‘ooo 시집’이라고 적혀 있었다. 김민재는 마치 이곳에 우리 외의 사람은 없다는 듯 주연에게 먹일 피자 조각의 가장자리를 잘라내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조영희가 시집을 받아들려는데 가게 점원이 뛰어와 남자의 팔을 낚아챘다. 


“아저씨, 여기서 이러면 안 돼요.”


점원은 조영희 쪽을 바라보며 연신 죄송하다며 그를 밖으로 끌고 갔다. 조영희는 미처 자신이 시집을 받아들려던 팔을 내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엄마, 저 아저씨 누구야? 주연이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김민재가 대답하며 샐러드를 주연에게 내밀었다. 이런 거 먹어야 건강해지는 거야.

“그거, 시집이었어요.”


돌아오는 차 안에서 조영희가 어둑해진 창밖을 보며 말했다. 주연은 피곤했는지 뒷좌석에서 잠들어 있었고, 김민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조영희를 바라보았다. 아까 그 사람이 내민 거, 시집이었다고. 조영희는 혼잣말처럼 뇌까렸다. 시집을 팔러 온 남자가 밖으로 쫓겨나는 걸 보면서 조영희는 문득 박현우를 떠올렸다. 한과를 잔뜩 들고 기우뚱거리며 이곳저곳을 다녔을 그의 모습을.


집에 도착한 주연은 보니것에게 다가가 쓰다듬으려다 그만 다리를 홱 잡아챘고 보니것은 카악, 하며 몸을 뺐다. 조심하라고 했지. 조영희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주연을 나무랐다. 엄마 미워. 주연은 제 방으로 들어가 방문을 쾅, 소리가 나도록 닫았고 김민재는 타박하듯 한 소리 얹었다. 


“그러게 고양이 치우자니까. 애한테 안 좋다고.” 


조영희가 결혼하면서 친정에서 데려온 보니것에게 김민재는 곁을 내어주지 않았다. 다리가 불편한 고양이를 집에 두는 것이 주연에게 좋지 않다고 여겼다. 이를 닦기 싫다는 주연과 실랑이를 벌이며 간신히 씻긴 후 조영희는 침대에 누웠다. 조영희 곁에서 자는 걸 좋아하는 주연은 오늘은 혼자 자겠다는 선언을 함으로써 본인이 삐졌다는 사실을 알렸고, 김민재는 할 일이 있다며 서재로 갔다. 침대에 몸을 누이자 무언가 끌어당기기라도 하듯 몸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날 밤 조영희는 꿈을 꾸었다. 빨간 곱슬머리를 한 J에 이어 박현우와 시집을 팔러 왔던 남자가 연달아 등장했다. 꿈인데도 매캐한 냄새가 났다. 냄새는 점점 짙어졌고, 조영희는 숨을 쉬려고 몸을 버둥거리다 눈을 떴을 떴다. 방안은 깜깜했고 김민재는 어느새 옆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조영희는 목을 축이려고 부엌으로 나갔다. 정수기에서 물을 따라 마시던 조영희는 그 냄새가 무엇이었는지 불현듯 깨달았다. 그건 경멸이 내뿜는 냄새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에 대한 경멸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주연의 선물을 사러 나온 조영희는 강남 교보문고에서 박나영을 만났다. 박나영이 박사 졸업 논문을 위한 자료를 찾는 동안 조영희는 커트 보니것의 책 한 권을 빼 들었다. 베스트셀러 코너에 있지 않아 검색해서 뒤져낸 것이었다. ‘풍자와 블랙 유머의 대가인 커트 보니것이 제2차 세계 대전의 드레스덴 폭격 사건을 소재로 쓴 독특한 반전 소설’, 이라고 책 띠지에 쓰여 있었다. 계산대에서 박나영은 의아하다는 눈길로 조영희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커트 보니것은 왜? 소설의 제목이 아니라 작가의 이름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 박나영도 아는 작가인 듯했다. 그냥, 궁금해서. 박나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지막이 내뱉었다. 너랑 안 어울리는데. 조영희는 못 들은 체 책이 든 봉지를 받아들었다.


“죽었어.”


집필실에서 보았다는 쥐는 잘 있냐고, 가볍게 던진 질문에 박나영이 카페 창 밖을 내다보며 툭, 대꾸했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도 날이 벌써 어둑해지고 있었고, 옷깃을 턱까지 올린 사람들이 잰걸음으로 거리 위를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누구 하나 얼굴이 제대로 보이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약을 쳤거든.”


같은 건물에 있는 교수 하나가 쥐와 마주친 바람에 건물 전체에 쥐약을 놓으라는 지시가 내려왔다는 것이었다. 약을 먹고 죽었을 쥐가 떠올라 몸서리가 쳐졌다. 죽은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 그냥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간 거 아닐까, 죽은 걸 직접 본건 아니니까, 어쩌면 다른 곳으로 갔을 수도 있고, 어쨌든 경자한테는 안 어울리는 곳이었으니까. 박나영은 자신이 붙인 이름으로 쥐를 부르며 혼잣말처럼 말을 쏟아내더니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크게 들이마셨다. 그런데, 그 책은 정말 뭐야?


“트라팔마도어가 어딘지 알아?”


조영희가 뱉은 말에 박나영은 조영희를 잠시 바라보더니 입을 똈다. 응. 몇 년 전 유행처럼 커트 보니것을 읽어대던 시절이 있었다고. 조영희는 그 유행을 왜 자신은 몰랐는지, 어쩌면 우리 둘은 다른 세상을 살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커트 보니것은 너한테 안 어울리는 것 같은데.”


조영희는 왜냐고 물어보려다 말았다. 이유를 듣고 나면 정말 커트 보니것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이 될 것만 같아서였다. 문득 창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쪽이 잘 보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여기는 환하니까. 저 사람들 눈에 내 표정은 어때 보일까.

조영희는 거실 소파에 앉아 책을 펼쳤다. 박나영과 헤어지고 어린이집에서 주연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주연은 간식을 먹고서는 자기가 좋아하는 만화 프로그램이 시작하면 꼭 깨우라고 신신당부하며 침대에 누웠다. 블랙 유머로 되어 있다는 책은 몇 페이지를 넘겨도 웃긴 구석이라고는 없었고, 내용도 뒤죽박죽이었다. 트라팔마도어가 주인공 빌리가 납치된 외계 행성의 이름이라는 사실은 칠 년 만에 알게 됐다. 

“오늘은 그렇죠. 하지만 다른 날에는 당신이 보거나 읽던 어느 전쟁 못지않게 끔찍한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그건 우리도 어쩔 도리가 없기 때문에 그냥 안 보고 말지요. 무시해버립니다. 우리는 기분 좋은 순간들을 보면서 영원한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므로 모든 죽음 앞에서 트랄파마도어인은, 그리고 빌리는 이렇게 말한다. “뭐 그런 거지.”

조영희는 그날의 만남에 대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박현우가 보냈던 문자, 그러니까 트라팔마도어에 가지 않겠느냐는 질문에는 끝내 답을 하지 않았고 박현우로부터 더이상 연락은 오지 않았다. 이후 박현우의 소식은 들은 바 없었다. 조영희를 만나는 동안 박현우는 끝내 SNS를 하지 않았다. 어쩌면 조영희와 헤어진 후 시작했을지도 모르지만, 조영희가 찾아보는 일은 없었으므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메트로놈 같았던 그의 걸음새는 불쑥불쑥 떠오르곤 했다. 조영희는 이따금 생각했다. 그가 트라팔마도어에 갔을지도 모른다고. 


조영희는 김민재와 주연을 사랑했다. 그러나 엄마 말대로 김민재가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여전히 들지 않았다. 이따금 기분 좋은 순간들이 있었지만 그걸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박현우는 나와 비슷한 사람이었을까. 조영희는 어쩌면 다리를 절었던 그 남자, 박현우를 그렇게 보내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삶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상상해보려 했다. 그때 잠에서 깬 주연이 찾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 어딨어? 조영희가 소파에서 일어나 딸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괜찮아. 엄마 여깄어. 

김사영(영어교육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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