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정(철학과 강사)
박현정(철학과 강사)

태양빛을 향해 얼굴을 돌리는 해바라기를 말리거나, 꿀단지 개미인 개체에게 군집을 위한 희생 말고 다른 삶의 가능성을 모색하라고 요구해봤자, 아무 데나 당위를 내세운다는 핀잔을 듣기에 딱 좋다. 다양한 존재자들의 다양한 존재 방식이 ‘당위’에 기댄 우리의 조정에서 빗나가 있다. 그러나 인간만은 예외인 것 같기도 하다. 우리가 타인을 평가할 때 즉각적으로 덮어씌우는 ‘당위’의 항목만도 수십 가지가 넘는다. 

그러나 느슨한 의미로 ‘존재론’으로 분류되는 현대적 사유는 하나같이 오랜 ‘당위’를 산산이 분쇄한다. ‘당위’란 모든 존재자들의 근거로 있는 초월적 존재자, 신적 존재자 없이는 확보될 수 없는데, 현대적인 존재론들은 바로 이 신적 존재자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기 떄문이다. 그 안에 무(無)라고는 전혀 포함하지 않기에 어떤 한계에도 갇히지 않고, 그래서 유한자들 상호간의 작용에 의한 온갖 변화와는 동떨어진 영원불명의 완전성이란 실재하기보다는 우리의 표상에 의해 상정될 뿐이다. 그러니 신적 존재자의 높이에 닿기 위해 우리가 따르는 ‘당위’라는 것도 근거를 잃는다. 

신적 존재자는 흔히 ‘존재’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신적 존재자로 이해된 존재는 실제의 ‘존재’와는 거리가 멀다. 모든 존재자를 이러저러하게 존재케 하는 ‘존재 자체’가 실은 끊임없는 창조여서 전통적인 무한자에게는 오히려 허용되지 않았던 열린 생성을 실행한다. 그리고 현대 존재론은 이런 존재가 자신을 던져 낳는 존재자들, 작고 사소한 존재자들의 실제의 존재 방식을 존중한다. 아무리 존재자들의 개별적 존재 방식보다는 존재 일반을 문제삼는 것이 존재론의 일이라고 하지만, 현대 존재론에서는 당위를 중시했던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 개별성을 폄하하는 일은 없다. 덕분에 우리는 누구나가 차이나 다양성을 상찬하고, 모두가 타인의 고유성을 최대한 존중하라고 조언하는 시대를 살아간다.

그러나 각각의 존재자들의 존재 방식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인정하는 일은 정확히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존재 자체가 아무리 끊임없는 생성으로 있다 해도, 각 순간 각 존재자들의 존재는 과거와 미래, 세계 전체로 뻗쳐 있는 관계 연관에 의해 구체성을 갖게 된다. 이 구체성 속에서 존재자들은 이러저러한 것으로서 한동안 지속한다. 인간 역시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대체로 고집 불통의 이기주의자들로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유동하는 존재만큼이나 한 인간의 구체성이 동등한 구체성과 만나 얼마나 어울릴 수 있는가, 그리하여 도대체 서로 다른 개별성이 서로를 얼마나 존중할 수 있는가는 심각한 문제거리다. 『정의론』을 쓴 롤스는 태생적 환경뿐 아니라 타고난 능력조차 분배를 결정하는 조건이 되지 않도록 하는 사회가 공정하다고 믿었다. 우리는 그런 믿음 속에서 롤스가 ‘당위’를 내세워 실제로 인간들이 존재해가는 방식을 부인하려 들었다고 봐야 할까? 반대로 가진 자들의 오만과 자기보존의 욕구뿐 아니라 갖지 못한 자들의 열패감과 무력함에도 다 이유가 있다고 항변하면서, 우리는 오히려 이 세상의 모든 차별과 압박, 폭력과 배제를 그대로 내버려두기를 선택하는 것은 아닐까?

전통 존재론이 그토록 당위에 매달렸던 것도 단순히 우연한 잘못만은 아닐 것이다. 무한자를 제거한 대로 우리는 여전히 유한자이며, 유한자로서의 한계 속에서 그 한계를 넘어서는 모험을 지속할 뿐이다. 그리고 모험은 안전하지 않은 길을 택하고 걸어내는 일로서, 불가피하게 방향 설정을 포함하게 된다. 

그러므로 어쩌면 현대의 존재론은 당위를 분쇄하는 일을 넘어, 유한자의 당위를 새롭게 숙고할 수 있어야 한다. 존재론은 본래 그 자체로는 어떤 당위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로써 존재론이 당위를 세울 수 있는 여지나 그 정도에 대한 고민에 무관심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되돌아보면 필자가 학문의 길에 막 들어섰을 때, 하필이면 존재론에 매료됐던 것은 내가 짊어질 당위에 앞서 ‘존재’에 문의하기 위해서였다. 어떤 독단에도 부당하게 휘둘리지 않으려면 ‘존재’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한편으로 고백컨대 스스로의 미숙함을 증오했던 사람으로서, 섣부른 판단을 잠시라도 유보하고자 했던 의향과 맞아떨어지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존재를 통해 그것이 굳건히 뒷받침해줄 수 있는 어떤 당위에 이르고 그것에 삶을 걸고자 했던 갈망에서 행해진 선택이기도 했다. 여전히 무엇을 의욕해야 할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적어도 존재와 당위의 이분법을 넘어서 사유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만은, 필자에게는 이제 한층 더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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