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부 송유하 기자
사진부 송유하 기자

전공 수강 과목 중 중학교 수업 실연 활동이 있었다. 그럭저럭 나의 차례를 마친 후 같은 과 동기의 실연을 지켜보게 되었다. 동기는 당시 죽음이 주는 의미를 주제로 실연을 진행했는데, 이 과정에서 그가 던진 질문들은 같은 수강생들로 하여금 각자의 삶을 반성하고 고찰하게 만들었다.

질문들은 이랬다. ‘내일 죽게 된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요?’ ‘1년 후에 죽게 된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요?’ 마지막으로 ‘50년 후에 죽게 된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요?’였다.

총 세 가지 질문 중 첫 번째 질문에 대해 그냥 평소와 다름없을 것 같다고 했고, 두 번째 질문을 향해선 해외여행을 마음껏 할 예정이라 답변했다. 억만장자가 된다면 백화점보다 공항을 먼저 갈 정도로 여행이라는 낯섦 속 설렘을 사랑하기에.

그러나 세 번째 질문을 앞두고 머뭇거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지금의 나이까지 합쳐 앞으로의 50년까지 생각한다면, 해당 물음은 결국 남들과 비슷하게 주어진 삶의 시간 속에서 어떤 인생을 살았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 깊게 고민하게끔 만들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말고 의미 있게 구성하라는 메시지는 게으른 일상을 자연스레 여기는 내 모습을 제삼자로서 곰곰이 바라보게끔 했다.

교내 온라인 커뮤니티나 지인들의 SNS를 살펴보면 외부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반면 나는 집에 머무는 걸 선호하며 혼자서 전자 기기를 가지고 노는 정적인 생활을 추구한다. 무언가 운동이나 빈번한 약속과 같은 외부 활동은 스스로를 더 지치게 만든다. 그렇기에 특정 행사나 모임을 위해 열정적으로 노력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멋있다는 생각과 함께 한편으론 ‘의무도 아닌데 왜 저렇게까지 힘쓸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따라서 아까의 세 번째 질문은 소위 게으르다고 할 수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해 깊게 고찰해보라고 조언을 건넨 듯했다. 과연 게으름이 진정 의미 있냐고.

게으름은 분명 비난받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이로 인해 본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봐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 같은 사람의 경우 적당한 게으름은 오히려 스스로를 활력 있게 하는 것 같다. 잠깐이더라도 예상치 못한 외출 혹은 필수가 아닌데도 맡게 되는 직책에 대해 남들보다 최소 2배 이상 스트레스를 받는다. 과제나 발표 준비 및 기존에 예정된 약속이 아니더라면 ‘꼭 해야 해’라는 생각이 든다. 희망 직업을 얻기 위해 그리고 거의 유일하게 사랑하는 외부 체험인 여행을 위해서 행동해야 함을 안다. 하지만 거시적인 목표를 제외한 미시적인 것들 예를 들어 등산, 문화센터 수강과 같은 취미나 자발적인 면에 대해서도 ‘성과’가 있다고 인정받을 일만 해야 하나 싶다. 이 부분에서만큼은 온전히 나의 임의가 아닌가. 칩거 생활을 한다고 해서 앞집으로부터 무작정 비난받을 순 없다. 조별 발표 혹은 분리수거처럼 타자에게 영향을 끼치는 상황이거나 본인이 직접 약속한 게 아니라면 혼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하나의 취향이라 주장하고 싶다.

부족한 자원에 대한 경쟁이 심해지고 능동적인 인재상을 추구함에 따라 소극적인 삶을 부정적으로 여기는 관점과 충돌한 적이 많다. 그러나 ‘적당한’, 개인의 만족 하의 ‘적당한’ 게으름은 사람마다 지니는 특성 중 하나이지 않을까? 게으름은 일종의 여유와 자기 충전으로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오전 내내 누워 있었다고 자기 자신을 너무 한심하게만 바라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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