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요한 교수(종교학과)
유요한 교수(종교학과)

오월의 한 가운데에는 ‘스승의 날’이 있다. 애초에 선생과 학생이 함께 부담감과 민망함을 느끼는 날로 기획됐겠으나, 캠퍼스에 학생의 자리가 비면서 완전히 공허한 날이 됐다. 그나마 학생 없이 선생이란 아무것도 아님을 새삼 깨닫게 된 것은 긍정적이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가 극복된 후에도, 스승의 날에는 선생이 학생과 만남을 피하고 자신을 점검하는 날로 보내면 좋겠다. 내가 감히 가르쳐 인도하는 사람의 뜻을 지닌 ‘스승’ 호칭을 감당할 만한 사람인지, 아니면 적어도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선생’ 역할은 잘 수행하고 있는지 돌아볼 기회를 갖자는 것이다. 특히 나처럼 15년 넘게 서울대에서 선생의 자리에 있으면서 부끄러움만 켜켜이 쌓아온 사람에게 꼭 필요한 일이겠다.

오랜 시간 인류의 ‘스승’으로 인정돼온 사람들에게 자신을 비춰보는 것은 ‘선생’으로서 자신을 돌아보기 위한 좋은 출발점이다. 인류의 스승들은 학생 섬기는 일을 기꺼워했다는 점부터 생각해 보자. 고타마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됐으나 고통받는 인간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는 길을 택해 제자들과 탁발을 하며 살았다. 십자가형을 앞둔 예수는 허리에 수건을 동여매고 곧 자신을 배신할 제자들의 때 묻은 발을 닦았다. 선생은 미숙해 보이는 학생들을 섬기며 이들을 위해 희생하는 일을 감내해야 한다.  

또한 스승은 학생이 성장하도록 도우며, 나아가 학생이 자신을 뛰어넘는 것을 기뻐한다. 구약성서의 선지자 엘리야는 제자 엘리사가 자신의 두 배나 되는 능력을 발휘하고 싶다고 했을 때 이를 받아들였고, 예수는 제자들이 곧 자신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대학에서 교수의 연구는 학생들에게 이어지기에, 나아가 학생들이 교수를 넘어서는 연구를 해낼 것이 기대되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연구에만 집중해 교육을 통한 발전에 힘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행여 뛰어난 자질을 지닌 학생이 너무 튀는 꼴을 보기 싫어한다면, 대학에서 필요로 하는 선생이 아닐 것이다. 

좋은 선생이 되려면 좋은 어른이어야 한다. 공자의 제자들은 스승을 아집에 빠지지 않았던 분, 근거 없이 마음대로 결정하거나 무리하게 단언하지 않았던 분으로 기억했다. 이런 스승이 제자들의 학문적 성취도 도울 수 있다. 안연은 스승 공자가 제자들을 차근차근 인도해서 견문을 넓혀줬고, 그래서 공부를 그만두려고 해도 그만둘 수 없었다고 했다. 

스승은 교육이 효율적으로 이뤄지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행정적인 업무도 피하지 않는다.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로 구성된 작은 공동체에도 조직이 필요했다. 예수는 밤을 새워 가며 핵심이 되는 열두 명의 제자를 직접 선발했고, 가르침을 전할 칠십 명의 파견단을 꾸렸다. 우리 학교 교수도 학생들이 탁월한 실력과 훌륭한 인성을 갖춘 인재로 성장하는 기틀이 될 수 있는 체계와 조직을 세우기 위해 계속 노력해야 한다. 또한 급격한 변화가 이어지는 이 시대에, 우리 대학이 나아갈 방향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이를 위해 과감한 결정을 내릴 수도 있어야 할 것이다. 스승과 제자가 함께 하는 공동체 조직은 시대를 앞서가며, 때로는 사회를 놀라게 하는 개혁을 주도하기도 했다. 붓다가 고대 인도에서 상상하기도 어려웠던 천민의 승단 가입과 여성 승려를 인정했듯, 서울대 교수도 위기의 시대에 어떤 개혁을 주도할 수 있을지 생각해 봐야 한다. 

오월의 끝자락이다. 신록이 번져 짙은 푸름이 되는 오월은 우리가 세월 속에 있음을 잊게 한다. 그래서 피천득 선생은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오월 속에 있다”라고 썼다. 학교 선생이 다른 직장인보다 세월의 흐름을 덜 민감하게 느낀다면, 아마도 오월을 닮은 청춘들과 함께 하는 특권 덕분일 터이다. 학생들이 세 학기째 자리를 비운 오월의 캠퍼스에서, 선생의 책무와 역할에 대해 다시 헤아리자. 고개를 들 수 없게 부끄럽지만, 자신에게 다시 묻는다. 오월 같은 학생들에게 나는 어떤 선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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