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민 편집장
박지민 편집장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항가리. 걸어서 버스 정류장까지 20분, 편의점까지 30분. 젊음보다 황혼이 깃든 곳. 너무나 조용해 밤늦게 귀가할 때면 마을 개들을 죄다 깨워 미안해지는 우리 집. 도로명 주소로는 ‘신뱅이길’이다. 항가리 신전(新田)마을의 5반을 예전 주민들이 신뱅이라고 불렀단다. 신뱅이는 김치로 유명하다. 근처에는 예술인들이 모여 살고, 그에 걸맞게 전북도립미술관과 전주예고가 있다. 산책하다 사람을 마주치는 때가 드물다. 이웃 주민들을 동호수가 아닌 옆집, 앞집, 뒷집이라 부르는 여기서는 사람 냄새가 난다. 엄마와 아빠, 강아지가 맞아 주는 신뱅이의 시간을 좋아했다.

이곳에선 닭 울음소리가 일러주는 아침부터 별이 어슴푸레 보이는 밤까지, 아주 느긋이 시간이 흐른다. 서두를 것 없이 흘러가는 대로 여유롭게 지내다 보면 다음 날이 온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면 모든 속박과 굴레에서 벗어나 신선이 된 기분이다. 그러다 6년 전 이 도시에 왔다. 서울에 올라와서 가장 힘들었던 건 시간의 차이다. 정확히는 시간의 속도 차이. 서울의 시간은 신뱅이의 그것보다 몇 배는 빨리 흐른다. 신뱅이의 시간에 맞춰져 있는 몸과 마음에 도시의 속도는 가혹했다. 따라가기도 벅찬 흐름에 공포를 느끼고 좌절에 빠지기도 했다. 그럴 땐 아등바등 급류에 발맞춰 가는 이들을 왜 저리 힘들게 사냐고 억지로 조소하며 느려터진 자신을 위로했다. 그러면서 씁쓸한 마른침을 남몰래 삼켰다.

빠른 시간의 흐름에 적응할 용기가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뭔가에 몰두하고 성취하기보다는 어떻게든 되지 않겠냐며 살아왔기에, 삶의 방식을 부정 당하는 게 싫은 자기방어였던 것 같다. 하나 마음 한편에서는 조급함이 밀려왔다. 이 파도에 타지 못하면 보물섬에 가기는커녕 해변으로 밀려나겠다는 공포가 더 정확하겠다. 분에 넘치는 자리를 맡은 것은 파도를 거슬러 헤엄이라도 쳐보려는 시도였다. 서울의 시간에 적응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던 반년을 보내고 나니, 목표를 위해 묵묵히 나아가는 이들에 경외를 품게 됐다. 서울의 시간은 이 촌놈에게만 가혹한 게 아니었다. 서울의 시간에 따라가기 위해 많은 걸 희생하면서도 내색하지 않는 이들을 보며 부끄러워졌다. 혼자만 힘든 게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을, 동료들을 보며 깨달았다. 해서 파도 타는 법을 배우려고 한다. 이걸 철듦이라 발음하기로 했다. 

세상일 마음대로 되지 않는 법. 보물섬에 못 가고 내팽개쳐질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파도 타는 법을 익혔으니. 다다르지 못할 섬을 뒤쫓는다고 비웃던 자신보다는 하나라도 더 배운 셈이다. 뭣하면 신뱅이에서 좀 쉬다가 다시 여행을 떠나면 된다.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 이 나라에서 시간의 속도가 가장 빠른 이곳에서 신문을 만드는 곳이 있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회의하며 기사를 쓰는 사람들이 모인 여기에서, 나는 신뱅이의 시간과 작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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