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이 만난 사람들 | 이동진 영화 평론가 인터뷰

‘영화 평론가’라고 하면 바로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수많은 한줄평과 별점으로 화제를 불러일으키는가 하면 GV(Guest Visit)*나 유튜브로 영화 애호가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는 그의 이름은 이동진이다. 『대학신문』은 영화 평론가 이동진의 삶을 들어보고자 작업실 ‘파이아키아’를 찾았다. 온갖 책과 영화 포스터, 수집품으로 가득 찬 신비로운 공간에서 그와 얘기를 나눴다.

Q. 작업실이 멋져요. 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어려서부터 수집벽이 있었고, 책도 워낙 좋아했죠. 기본적으로는 책의 집 같은 거예요. 10여 년 전에 신문사를 나와 프리랜서 생활을 하면서 작은 오피스텔이나 사무실을 전전하다가 무리를 해서 만들었죠. 들어온 지는 1년 반쯤 됐고, 설계는 건축가분께 부탁드렸죠. 평생 모아왔던 책들이 모두 들어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이름의 유래는 너무 거창한 것 같은데. 신화를 좋아해요. 많은 분이 아실 『오디세이아』에서 오디세우스가 포세이돈의 진노를 사 헤매다가 고향 이타카에 도착하기 바로 직전 섬 이름이 파이아키아예요. 거기서 오디세우스가 겪었던 일들을 마을 사람들에게 얘기해 주는데 그 이야기를 사람들이 잘 듣거든요? 그 이야기가 끝나면 집에 가지 않겠어요? 여기를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마음을 열고 들어줄 만한 최소한의 태도를 갖춘 사람들에게 마음껏 말하고 싶은 공간인 거죠. 유튜브 채널 이름도 그렇게 지었고요. 오디세우스처럼 계약 기간 끝나면 집에 가야죠. (웃음)

Q. 종교학과를 선택한 계기나 이유가 있을까요?

입학하기 3년 전쯤까지는 학부제여서 철학과가 철학부였어요. 지금의 종교학과, 철학과, 미학과가 같은 과였죠. 그런데 시험을 보기 1~2년 전부터 학과로 바뀐 거예요. 고등학교 때는 철학을 하고 싶었거든요? 그땐 철학을 잘 안다고 착각하고 있었어요. 미학이랑 종교학은 잘 모르니까, 어떤 학문인지 알고 싶었는데요. 아는 형이 미학과여서 그 형에게 미학과 얘기를 많이 듣고 미학도 알고 있다는 착각을 했죠. 재수를 할 때, 마음의 여유 같은 게 있어서 여름 방학에 서울대 종교학과에 개인적으로 전화를 드리고 찾아갔어요. 조교 형 입장에서는 얼마나 예뻐 보였겠어요? 나중에 학과장까지 되셨는데. 그분이 책 몇 권을 챙겨주셨고, 그중 퇴임하신 정진홍 교수가 쓴 『종교학 서설』이라는 책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죠. 또 그 책에 엘리아데라는 학자 얘기가 많이 나오거든요? 그렇게 책을 통해 알게 된 엘리아데라는 학자, 감명을 준 정진홍 교수 등 종교학에 깊은 인상을 받게 됐고 종교학과를 선택하게 된 거죠.

Q. 평론가님이 쓰신 종교학적, 철학적 영화 평론에서 열정이 느껴진다고 하는 팬도 있더라고요.

잘 몰라서 그런다고 생각해요. 지금 한국에서 활동하는 평론가들의 전공이 다 다양해요. 그런데 신문방송학과 전공했다고 최고의 영화로 〈더 포스트〉를 꼽지 않고요, 인류학과 전공한 사람이라고 〈불을 찾아서〉 꼽지 않고요, 서양사학과 전공했다고 〈여왕 마고〉 안 꼽거든요? 그런데 유독 종교학이라는 전공이 특이하니까, ‘아 이 사람 종교학과 나왔지?’ 하고 연결하시는 것 같아요. 방금 예시를 든 사람들 모두 실제로 유명한 평론가들인데 그분들에게는 아무도 그렇게 얘기 안 하거든요. 사람이 세상을 이해할 때는 결국 자기 안에 있는 틀로 얘기하기 마련인데, 왜냐하면 그게 쉽거든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을 이해할 때 ‘이 사람 어디 출신 20대잖아, 그러니까 어떨 거야’라는 식으로 우리는 보통 해석한단 말이에요? 제가 어떤 영화를 좋아하는 것을 내적인 논리나 평론에서 발견해야 하는데, 외적으로 판단하려고 하는 거죠.

파이아키아에서 만난 이동진 영화 평론가
파이아키아에서 만난 이동진 영화 평론가

Q. 기자 시절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종교학이라는 학문에 매력을 느꼈고, 공부를 계속 하고 싶었어요. 아까 말했던 엘리아데라는 학자가 미국 시카고대 교수였거든요. 저학년 때는 막연하게 시카고대로 유학을 가서 학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죠. 그러다 2학년 1학기 마치고, 간단히 얘기하면 갑자기 군대에 가게 됐어요. 거기서 또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데 그것 때문에 유학을 포기하게 됐죠. 그래서 세월을 약간 허송하다가 4학년이 되면서 차선책으로 기자를 해보면 어떨까 생각했고요. 그렇게 해서 기자가 됐죠.

입사 직후에는 사회부와 편집부에 몇 년간 있었어요. 그러다 대학 때 영화 책을 쓴 사실이 알려졌고, ‘영화 전문가 아니야?’ 하고 받아들여 주더라고요. 그래서 문화부로 발령났죠. 신문도 젊은 독자들을 겨냥하고 탈바꿈하는 상황이었어요. 대부분 굉장히 베테랑, 주필 같은 분들이 ‘누구’ 칼럼을 가졌거든요? 그런데 시대 변화가 맞물려서 굉장히 과감한 시도를 「조선일보」에서 했고, 그 수혜자가 저죠. 그래서 ‘이동진의 시네마 레터’라는 칼럼을 쓰게 됐죠. 저에게 뭔가 특별한 게 없지는 않았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적인 변화와 우연히 잘 맞아떨어진 건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Q. 신문사를 퇴사할 때 두려움이 크지는 않았나요?

다른 사람보다는 권태를 덜 느끼고, 했던 일을 반복하는 데 싫증을 덜 내는 타입이에요. 정반대로 어느 변곡점에 도달하면 못 참아요. 어쨌건 기자 일이라는 게 차선으로, 정확히는 차악으로 선택했던 거고, 잘 풀렸고 운이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조직 생활을 하는 게 괴로웠어요. 계속 생긴 내압을 누르다 어느 순간 견딜 수 없게 된 거죠. 그때는 ‘새로운 세상을 개척하겠다’가 아니라 ‘망가져도 좋으니까 나가고 싶어’라고 생각했죠.

이때 먹었던 마음 중 하나가 ‘하고 싶은 일 못 하고 사는 것까지는 오케이, 인생이란 게 호락호락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하기 싫은 일은 안 하겠다’라는 거예요. 지금 하는 일도 다 제가 좋아서 하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너무 싫은 일은 없어요.

Q. 블로그, 유튜브 등을 통해서 팬들과 계속 소통하고 계시는데, 그 동력이 궁금해요.

사람은 모두 양면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저도 사실은 익명의 시선으로부터 피하고 싶은 욕망이 굉장히 강하고요. 나갈 때는 마스크랑 모자를 쓰고 또 빨간 안경을 안 쓰니까 알아보는 사람이 없어요. 또 회식 자리 있으면 언제든 도망갈 수 있는 구석에 앉아요. 반면에 어떤 측면에서는 적극적으로 익명의 다수와 다대일(多對一)로 얘기하는 것에 굉장히 익숙해요. 인터넷 시대가 오면서 신문사에서 기자 개인 커뮤니티 같은 걸 만들기 시작했어요. 그중 제 것이 잘 됐거든요. 그때부터 다대일로 소통하는 것에 익숙해졌죠. 게다가 라디오 디제이도 여럿 했거든요. 그러다 보니 블로그를 통한 소통이든 유튜브 채널에서 라이브 방송을 하든 어색하지는 않아요. 그러니까 소통을 하는 동력은 제가 재밌어서, 좋아서 하는 측면이 크죠.

Q. 시네마톡, 라이브톡과 같은 GV가 온라인상의 소통과 다른 점이 있을까요?

기본적으로는 강의라고 생각해요. 항상 시간에 쫓기다 보니 제가 주로 말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 같고요. 이렇게 평론가가 나와서 GV를 진행하는 게 한국밖에 없어요. 외국에서는 영화제에 앞서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이나 출연한 배우들이 나와서 진행하는 경우가 대다수란 말이죠. 평론가는 영화를 만든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영화에 관한 생각을 100분에 걸쳐서 혼자 얘기하고, 그걸 전국 20개 넘는 극장에서 중계해요. 이런 시스템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어요. 뒤집어서 얘기하면 그걸 들을 의지가 있고 비용을 지불할 만한 태도를 지닌 관객도 한국에만 있다는 뜻이거든요. 평론가 입장에서는 굉장히 고맙고 귀한 일이죠.

Q. 평론가님의 평이 논란이 되기도 하잖아요. ‘대중적인 평론가’라는 평가도 나오고요.

어떤 글이나 어떤 말이나 어떤 별점이나, 이런 거 하면 사람들이 좋아하겠구나, 싫어하겠구나 어느 정도 짐작해요. 그런데 그것에 부담을 느껴서 어떤 말을 다른 말로 바꾼다거나 하지는 않아요. 하나하나의 반응에 일희일비하면서 생활하면 저는 아마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됐을 거예요. 좋은 말만 들었으면 좋겠지만 불가능하고, 그럴 바에야 그냥 제 말을 하는 거죠. 대중성을 획득하려고 일한 적은 없어요. 그 결과로 대중성이 생겼는지 아닌지 알 수 없으나, 생겼다면 정말 감사한 일이죠.

Q. 독서광으로도 유명하시잖아요.

저는 기본적으로 굉장히 잡식성이고요. 어떤 부분에 대해서 놀라울 정도로 관심이 없는데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더 이상할 정도로 너무 호기심이 많아요. 책을 통해 알고 싶은 세계가 너무 많고요. 일반적으로 책을 읽는 사람들보다 훨씬 넓은 편인 것 같아요. 세상에는 항상 읽고 싶은 책이 쌓여 있고, 허겁지겁 사들이고, 그렇게 반복하게 됐죠. 

결국 책을 본다는 것은 오락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 핵심은 지적인 욕구거든요. 지금 제가 제일 모르는 게 뭘까 생각하면 상대적으로 자연과학 쪽이겠죠. 그러다 보니 요즘에는 그쪽 책들이 재밌더라고요.

Q. 책을 많이 쓰시기도 하셨잖아요. 지금도 계획하고 있는 저작이 있을까요?

거의 매 순간 쓰고 있어요. 지금까지 15권을 썼는데요. 저는 즐거움을 위해 몸을 움직이는 사람이고, 제가 느끼는 즐거움의 상당수는 활자랑 관련돼 있어요. 영화도 물론 있지만. 그런 측면에서 항상 책을 쓰지 않을까 싶고요. 지금 머리 안에 쓰고 싶은 아이템만 해도 스무 가지쯤 있거든요? 그중 서너 권을 지금 쓰고 있습니다. 영화 관련 책도 있고, 아닌 책도 있고, 심지어는 사진집도 있고.

Q. 서울대에서 강의를 하시기도 했는데.

종교학과에서 먼저 요청이 왔고요. 굉장히 재밌는 제안이라고 생각했고, 새로운 일이었고, 아주 예전에는 해보고 싶던 일이기도 하고. 딱 3년, 6학기 했어요. ‘종교와 문화’라는 강의였고 나중에는 ‘종교와 영화’로 바뀌었는데. 200명 정도 듣는 대형 강의였어요. 일단 영화 강의니까 학생들이 재밌어했고요, 제가 교수님처럼 말하지는 않잖아요? 그래서 학생들이 좋아했고, 수업을 정말 열심히 들었어요. 중간고사 대체로 리포트 과제를 내고 기말고사는 서술형을 냈는데요. 성격상 조교한테 뭘 못 맡겨요. 200명 채점하는 건 지옥이더라고요. 너무 뿌듯한 한편으로는 너무 힘들었죠. (제안이 다시 온다면 하실 생각 있으신가요?) 저는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대로’니까 당장 한다 안 한다를 결정하지는 않고요. 다만 지금은 못 한다. 최소한 올해는 못 한다,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Q. 블로그 계정 이름인 ‘life isn’t cool’은 어쩌다 짓게 됐나요?

지난 인생을 돌이켜보면 운이 좋았음에도 누구보다 쿨하고 싶은데 인생은 쿨할 수가 없다는 걸 알게 됐어요. 인생은 쿨하지 않다고 저점을 깔게 되면 조금 더 마음이 편해져요. 예를 들어 ‘life is cool’이라고 해봐요. 그럼 ‘인생은 쿨한거야’ ‘꿈은 뭐든지 이룰 수 있어’ 이런 신념을 갖고 있다면 오히려 인생이 굉장히 불행할 수 있어요. 꿈이 이뤄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너무 괴롭잖아요. 그런데 저에게 인생은 원래 안 쿨하거든요. 살다보면 가끔 쿨한 일도 생기잖아요. 커피를 마셨는데 생각보다 맛있다든가. 그러면 행복한 거거든요. 행복의 역치를 많이 낮춘다고나 할까요.

*Guest Visit: 영화 상영 시 감독이나 영화 관계자가 직접 방문해 영화를 설명하고, 관객과 질의응답을 주고받는 무대.

 

사진: 이호은 기자 hosilver@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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